에세이
우리는 예외 없이 과거가 있다. 과거는 기억으로 저장되는데, 나쁜 과거도 있고 좋은 과거도 있다. 또 혼자서 간직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과거도 있다.
부부 사이에서 각자의 과거는 부부 관계를 좋게 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할 수도 있다. 부부로 연을 맺기 전의 과거를 굳이 밝혀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꼭 과거를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부부는 신혼 첫날밤 모든 과거를 털털 털고 가자는 말을 하면서, 과거의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이벤트는 위험하다. 괜히 과거를 이야기했다가 상황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의심과 앙금이 생기기도 한다.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과거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두 사람 사이가 충분히 성숙한 단계라면 과거를 말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숙한 단계란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심이 없으며 깊이 신뢰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렀다면 어떤 과거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들어줄 것이다.
부부 싸움 계명 중에는 싸움 중에 과거를 절대로 들먹여서는 안 된다는 게 있다. 대개는 부부 싸움을 할 때, 옛날에 당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단골 메뉴로 들고 나오는 레퍼토리가 있다. 이상하게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내 쪽이 많다. 아내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 그 과거는 나쁜 기억이다. 왜 그럴까? 일단 아내는 남편에 비해 과거의 소소한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남편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아내는 기억한다. 특히 좋지 않았던 일,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기회가 왔다 싶으면 기어코 꺼내어 남편의 코 앞에 들이댄다. 그런 부정적인 과거를 자꾸 들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내도 잘 안다. 그렇지만 어쩌랴.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서 자꾸 떠오르는 것을. 남편은 이런 아내의 과거 집착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가 행복하면 됐지 왜 자꾸 과거를 꺼내서 부정적인 마음이 들도록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 남편은 ‘행복한 부부의 십계명’, ‘부부 싸움 잘하기’ 등을 들먹거리며 이제 그만 과거는 잊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때의 생각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 시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아내가 바보인가. 아내도 과거를 들추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 불행한 사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일까?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대도, 왜 자꾸 과거를 꺼내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내는 괴로운 과거를 말하게 되어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그 과거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면, 속으로 “또 그 이야기!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얼굴을 찡그리면 안 된다.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과거를 말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상처를 숨기거나 억누르면 속에서 곪아 터지는 수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환자의 과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억압된 무의식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환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표출하게 되면 그 자체로 치료의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아내가 스스로 과거를 꺼내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제 남편은 아내가 과거사를 꺼낼 때 “또, 또 그 이야기한다. 이제 그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 그만해.”라고 말하는 대신 “좋아! 당신 그 이야기 안 하기로 약속했지만 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마음속에 덩어리가 있는 것 같아. 오늘은 끝까지 가보자.” 이렇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문제는 미래에 언제든지 재발하는 암 덩어리와 같다.
따라서 아내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야기를 꺼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응대할 때 ‘you’가 아닌 ‘I’의 화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때 당신이 그래서 그렇게 한 거야.” 대신에 “내가 이렇게 생각했던 건데. 내가 잘못 이해한 거였어.”라고 말해야 한다. 다만 ‘I’ 화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자꾸 방어를 하면 안 된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아내 : 그 겨울 내가 입덧할 때 사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춥다고 안 나가고.
남편 : 그때 눈이 엄청 왔잖아. 차들이 다닐 수가 없었다고.
아내 : 그래도 맘만 먹으면 갔다 올 수 있었어.
남편 : 그럼 당신은 내가 사고라도 나면 좋아?
아내 : 누가 사고 나면 좋대?
이런 식의 대화는 자기 방어일 뿐이며 아내의 화를 돋울 뿐이다. 다음의 대화는 똑같은 이야기지만 결론은 다르다.
아내 : 그 겨울 내가 입덧할 때 사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춥다고 안 나가고.
남편 : 그래 말이야.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지금도 그걸 얼마나 후회한다고.
아내 :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귀찮아서 둘러대는 거지.
남편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거야. 여보 기회만 줘. 내가 확실히 만회할게.
아내 : 정말? 난 왜 그 생각이 자꾸 나는지 몰라.
남편 : 풀지 못한 과거가 있으면 그게 마음 한쪽에 쌓여 있대. 그래서 그럴 거야. 오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사과 사다 줄까?
아내 : 사과는 무슨... 됐어.
남편 : 사과하는 의미로 사과 주스 마실까?
마지막 말은 약간 썰렁한 유머지만 이런 식의 대화가 바람직하다.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 “후회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앞으로 만회하겠다” 등과 같은 말을 통해 상대방은 마음을 누그러트리고, 마음속에 쌓여 있던 찌꺼기를 털어내도록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아내는 앞으로 이 이야기를 더는 꺼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아내가 입덧했을 당시 남편에 대해 좋지 못한 기억이 있지만 “어휴 말해서 뭐 해. 내가 참아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 터질 문제를 안고 있는 부부인 것이다.
과거를 이야기할 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심심풀이로 돌멩이를 던진 사람은 자기가 언제 어디서 돌멩이를 던졌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돌멩이에 형제가 맞아 죽은 개구리는 언제 어디서 그 돌멩이가 날아왔는지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이야기할 때 상처를 받은 사람, 상처가 남아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상처 준 사람은 방어적인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 당시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면서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방어적인 자세로 임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키우는 결과를 야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