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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의미

에세이

by 인산
삶이란 나눔의 과정이다.


우리는 나눔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서 자신의 것을 누군가에게 주기도 하고, 타인의 것을 받기도 하며 살아간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양육자의 나눔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이렇듯 나눈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군가를 전제로 하는 나눔은 삶이 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말 ‘나누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divide’로 ‘나누다’ ‘갈라지다’의 뜻을 지닌 ‘separate’와 유사하다. 이 경우의 ‘나누다’는 ‘공유하다’의 반대개념으로, 몫을 나누거나 시간을 쪼개 쓰고, 경계를 설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함께 하던 것을 각자 하게 된다는 개념으로 인간관계에서 분리를 뜻한다. 또 다른 하나는 ‘share’의 의미로 분리가 아닌 공유의 뜻이 있다.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과 함께 쓰거나 공유하는 의미의 ‘share’는 감정을 함께 나누거나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동참한다는 의미다. 즉, 마음을 나누는 것은 ‘share’의 의미에 가깝고, 서로의 몫을 나누는 것은 ‘divide’에 해당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devide’와 ‘share’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성경에 언급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은 divide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share를 실천한 것이다. 오천 명의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나눴(divide)지만 결국 함께 음식을 나눠(share) 먹은 것이 된다. 집단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수확물을 나눌 때 그것은 divide가 되지만 그 나눔이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share가 된다. 이렇듯 divide와 share는 동떨어진 의미가 아니다. 쪼개어 나누는 행위는 결국 함께하기 위한 준비이며, 분리는 동참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개인에 따른 빈부의 격차를 용인한다. 빈부의 원인이 무엇이든 개인의 능력에 따른 재산을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는 개인차에 따른 divide를 인정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좀 더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눔(divide) 자체를 넘어 진정한 나눔(sharing)이 실천되어야 한다. 나눔에는 물질적 나눔과 정신적 나눔이 있다. 함께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가 풍요롭지 못한 자와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그렇지 않는 자에게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물질과 마음의 나눔이 실천될 때 그곳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이처럼 나눔은 자신과 타인, 나아가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것이다.


예술은 대표적인 나눔의 행위다.


예술가는 지적 감성과 정서를 타인과 공유하는 사람이다.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한 사회에서는 예술이 고급과 저급으로 구분되며, 특정 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급 예술로 격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눔의 관점에서 보면, 값비싼 예술이 반드시 고급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이 나눔의 장인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능과 정서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순수한 나눔의 정신으로,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향유할 때 더욱 빛난다. 깊은 궁궐 안 소수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 감동을 나누는 거리의 예술이야말로 더 고귀할 수 있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예술정신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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