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리는 전통적으로 명절이면 먼 객지에 살던 일가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조상에 제를 지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인다는 것은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의미다. 한가위 때의 만남은 일차적으로 조상과의 만남이다. 현실적 존재인 후손과 비현실적 존재인 조상과의 만남은 후손들이 바쁜 일상 때문에 소원했던 조상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변화하고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앞으로도 조상의 은덕을 입어 대대손손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자리다. 이차적으로는 살아있는 일가친척들끼리의 만남이다. 한가위와 같은 명절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부모와 형제들을 만남의 장으로 이끄는 하나의 이벤트다. 이런 이벤트가 없다면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가친척의 만남은 친구의 만남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송편 만들기의 의미
요즘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대가족에 속한 개인의 삶에서 일가친척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가위의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행사는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 하나가 여자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 행위였다. 요즘은 남녀 불문하고 함께 송편을 만들지만 그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여하튼 송편 만들기는 단순히 음식을 장만한다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오랜만에 만난 여자들이 한데 모여 솜씨를 뽐내며 송편을 빚는 행위는 조상을 참배하기 위한 의례 이전에 마음을 준비하는 예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빙 둘러앉아 송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자들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도 늘어놓고 새로운 가족의 신화를 창조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보편적인 이야기는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과거에 송편 만들기는 주로 여성에게 맡겨진 일이었고 특히 성인 여성의 몫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송편에 빗대어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것은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한가위에 주어진 풍성한 수확과 음식에 감사하며 조상에게 건강한 자녀와 다산을 기원하여 자손 세세 번영을 누리게 해 달라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한 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맛있는 음식과 송편과 다산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송편과 자식과의 연계는 여성들에게 정성껏 송편을 빚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송편은 풍요와 다산뿐 아니라 형식과 내용에서도 다음 세대와 연결된다. 예쁜 송편을 빚으면 예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솜씨와 창조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은유적 표현이다. 또한 산모가 신생아를 출산했을 때 아이가 건강한가 하는 점이 제일 큰 관심사이고 보면 예쁜 송편에 담겨 있는 은유에는 여자들의 출산에 대한 불안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송편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조상에게 제를 올림으로써 건강하고 예쁜 아이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여자들의 간절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고 믿는 것은 자아 존중감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누군들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닐까? 당연히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자기의 뜻과 반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자기 행동을 자책하고 반성해도 다음에 다시 유사한 상황이 되었을 때 역시 마음대로 잘 안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마음의 주인일까? 그래서 “내 마음 나도 몰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들이 생겨났다. 내가 내 마음의 주체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도 그렇고, 흔들리는 마음은 주체적 존재감이 흔들리는 것이다. 주체가 흔들릴 때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중요한 주체의 문제는 실존주의 이래로 현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잠깐,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자아 존중감이 필요하다고 해도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집착과 자아 존중감은 구별되어야 한다.
엄마와 아이
만일 가족 내에서 엄마와 자녀의 경계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면, 피차 공유하는 영역이 없어 무관심하게 된다. 반대로 경계가 지나치게 모호하면 간섭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특히 요즘 엄마와 아이 사이의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럴 때 아이에 대해 권력을 쥐고 있는 엄마는 자기 방식대로 자녀를 양육하려 한다. 이것이 정도가 지나치면 엄마는 집착에 빠지게 되고 아이는 주체성과 독립성이 미약한 의존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 자아 존중감이 미약한 아이는 자기 울타리를 더욱 굳게 세워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아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자기 집착과 자아 존중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어떻게 하면 아이의 양육에서 제대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장애아동의 엄마들과 집단상담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자폐아거나 지적장애이거나 행동장애였다. 상담의 초반기를 지나 어느 정도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찰흙으로 만들기 작업을 하였다. 찰흙은 손과 접촉하기 때문에 촉감을 자극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해체할 수도 있으며, 바닥에 힘껏 내려칠 수 있으므로 정서 표현에 매우 유용한 도구다. 찰흙을 나눠주자, 엄마들은 처음에 망설였다.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있을 때 솜씨와 연관된 것이면 일단 부담감을 느낀다. 찰흙 만들기 역시 무엇인가 멋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찰흙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맘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만들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엄마들은 약간 긴장하면서 찰흙으로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우선은 손에 찰흙이 익도록 두 손바닥으로 돌리면서 둥근 공을 만들거나 바닥에 치면서 네모난 직육면체를 만들도록 주문했고, 다음으로 특별한 대상을 주문하지 않고 마음 가는 데로 무엇이든 만들어 보도록 권하였다. 그중 한 엄마는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다가 송편을 예쁘게 만들었다. 모두를 돌아가면서 찰흙으로 자신이 만든 것을 설명하였다. 송편을 만든 엄마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송편을 만들었다고 했다. 송편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재차 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다는 것은 송편 속에 당사자의 무의식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잠깐 생각을 더듬던 엄마는 푸념하듯이 대답했다. “송편은 내 마음대로 빚을 수 있지만 아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잖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심 깜짝 놀랐다.
내 맘대로 하기
아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첫째, 아이를 송편에 빗대어 한 말에는 엄마의 슬픈 속마음이 분명히 들어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 정말 예쁜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우리 아이에게 장애가 있단 말인가. 대개 장애아의 엄마는 자신이 잘못해서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 것처럼 생각하여 죄의식에 시달린다. 부부가 합심해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야 하지만 아빠는 나 몰라라 하고 등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집보다는 밖으로 나도는 것이다. 그럴 때 엄마들은 공통으로 커다란 배신감과 슬픔을 느낀다. “마음대로 빗을 수 없는 아이”는 이러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말이다.
둘째, 장애아에 대한 한탄과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묻어나는 이 말에서 엄마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말은 예쁜 송편처럼 예쁜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현재의 아이를 한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귀속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엄마의 소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를 송편처럼 인위적으로 빚을 수는 없다. 장애아든 비장애아든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비록 엄마와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엄마와 관계 이전에 그는 자체로서 주체적 인격체다. 엄마로부터 생명을 부여받고 엄마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아이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인간으로서 존엄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
부모와 아이의 분화
자칫 엄마는, 특히 장애아의 엄마는 자녀가 자신에게 귀속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엄마가 관심 어린 애정으로 끝까지 돌봐야 엄마다운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엄마와 자녀 사이에는 갈등의 씨앗이 잠복하여 있다가 언제든지 표면으로 올라올 수 있다. 장애아든 비장애아든 언젠가 ‘독립!’하고 외치게 될 때 심한 분화의 문제를 겪을 수 있다. 흔히 분화의 문제는 자식보다는 엄마 쪽에서 더 어려움을 겪는다. 분화가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엄마가 자기 몸을 통해 자식을 낳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 엄마와 신생아는 실질적(신체적)으로 분리되지만, 엄마의 몸은 여전히 아이와 연결되어 있는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그 기억으로 인해 엄마는 심리적·정서적으로 아이와 밀착되어 있다. 이따금 엄마는 갓 태어난 아기를 자신이 준 생명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로 착각한다. 착각이 아니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엄마의 착각은 모유를 먹이기 위해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 더욱 굳어진다. 가슴에 품은 아이는 그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다. 젖을 물고 있는 아이와 일체감을 느끼면서 마술적인 황홀을 경험한 엄마는 자신의 존재와 아이의 존재를 하나로 생각하고 아이를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가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돌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다만 거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특히 장애아의 엄마는 끝까지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과연 끝까지가 가능하겠는가? 엄마는 과연 내가 없을 때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집요하게 생각한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은 물론 아이에게 주체성의 문제가 생긴다면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지 않을까?
약자? 강자?
장애아든 비장애아든 다 같은 인간이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 때 동물의 세계를 자주 언급한다. 사자들이 누 떼를 공격할 때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 사자는 강한 누보다는 약한 누를 공격 한다. 약한 누가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도 하지만, 누의 입장에서도 강한 자가 살아남아 유전자를 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소위 사자가 솎아 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약한 사람, 이를테면 장애인이라고 해서 사자에게 희생되어야 하는가?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약자는 도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파르타가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으며 여전히 한쪽에서는 인간의 유전자 개량을 외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과학의 역사는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복잡한 사고체계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약자와 강자라는 개념이 동물처럼 적용되지 않는다.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스 박사는 약자에 속할까 강자에 속할까? 그러므로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약자인가 강자인가가 아니다. 그 사람이 주체성을 지니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소임을 다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엄마의 임무
엄마의 임무는 보살핌보다는 내 자식이 주체성을 가지고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엄마가 자녀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녀는 송편처럼 될 수도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장애아 역시 인간으로서 자신의 분명한 세계관이 있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려는 대신, 그의 세계관을 파악하고 이를 개발할 기회를 주고 원조하는 것이다. 이때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장애아 엄마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의식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이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엄마 스스로 자기 존중감을 가져야 한다. 성숙한 자의식과 자기애를 지닌 엄마는 결코 자녀를 송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 아이는 엄마가 마음대로 빗을 수 있는 송편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와 같이 비어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애초에 텅 비어 있지만 생을 영위하면서 이 비어 있음을 채우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태어날 때 비어 있는 인간은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채워 주체성을 확립하는 존재다. 주체의 형성에서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경계는 분명히 정해져 있다. 엄마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엄마는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온도를 맞춰주고 주위 환경을 적합하게 만들어 준 다음, 적절한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