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하얀 침대가 있습니다. 침대 틀도 하얗고 침대보도 하얗습니다. 너무 하얗고 깨끗해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똑같은 크기로 나누어진 침대에 크레파스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반듯하게 누워 있습니다.
크레파스는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각자 개성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싸울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웃한 색은 자기랑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음계가 한 단계씩 높아지듯 이웃한 색이 제일 비슷하고 멀수록 차이가 납니다. 검은색과 흰색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지만 제일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 부딪힌 적은 없습니다. 모두들 편안히 자기 자리에 누워 따스한 손길이 만져주길 기다립니다.
현윤이네 유치원에서 숙제를 내줍니다. 그중 하나는 엄마 숙제입니다. 현윤이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파랑, 엄마 말을 잘 안 들으면 빨강을 칠하라는군요. 현윤이는 착한 어린이입니다. 얼마 못 가서 파랑 크레파스는 몽당 크레파스가 되었습니다.
파랑이 말합니다.
“아! 행복해! 매일매일 따뜻한 손이 나를 잡아 주고, 감싸 주고, 문질러 주잖아...”
빨강은 화가 났습니다.
“왜 나만 미워하지? 잘못하면 언제나 빨강이야.”
그러자 크레파스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렸습니다. 빨강 이웃은 그래도 조용한 편인데 저쪽 파란색 쪽 색들이 노래하듯 빨강을 놀립니다.
“빨강 카드, 선수 퇴장.
빨강 신호등, 자동차 정지.
빨강, 빨강, 빨강...
빨강은 싫어, 파랑이 좋아.
빨강은 노우, 파랑은 예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빨강은 얼굴이 더욱 빨개졌습니다. 빨강이 파랑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별거냐? 멍이 들면 파랗잖아. 초록은 동색. 비슷하다고 무조건 같은 편을 드는 바보들...”
파랑은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얼른 입을 다뭅니다. 빨강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인 걸, 빨강은 금지의 표시야. 자랑스럽지도 않고... 왜, 왜, 왜! 나만 미워할까!”
빨강은 속이 상해 울상이 되었습니다. 밤이 깊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은 소동이 지나갔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유치원에서 그리기 대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크레파스들은 밤잠을 설치며 저마다 자기를 뽑아줄 것을 기대합니다. 다들 최선을 다해 예쁘게 단장합니다.
“이번엔 내가 우승해야지.”
“천만에, 이번에는 내 차례야!”
우승을 하다니요... 이게 무슨 말이죠? 아하, 크레파스들은 그리기 대회가 끝나면 자기들끼리 따로 대회를 엽니다. 아이들이 꿈나라에 가기를 기다렸다가 키 재기 대회를 여는 것입니다. 제일 작은 크레파스가 그날의 월계관을 쓰는 것이지요. 재미있지요? 키 큰 대회가 아니라 키 작은 대회라는 거... 그리고 가장 키 작은 크레파스가 우승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그리기 대회에서 그만큼 많이 쓰였다는 뜻이니까요!
현윤이는 아파트 뒷산 풍경을 그립니다. 산에는 소나무, 벚나무, 단풍나무가 서 있고 덤불도 무성합니다. 단풍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는 듬직합니다. 가을이 오면 조그만 뒷산은 색들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온갖 종류의 색들이 보따리를 풀어놓고 떠들썩한 잔치를 벌입니다.
현윤이 손이 움직일 때마다 크레파스들은 조금씩 키가 줄어듭니다. 몸에서 살이 떨어져 나가자 신기하게 흰 종이에 나무와 잎과 하늘이 생겨납니다. 어느새 현윤이 눈에 비친 뒷산이 물에 담긴 듯 흔들거리며 도화지에 새겨집니다.
현윤이 손가락이 크레파스로 물들 때쯤, 깨끗하던 침대도 더러워집니다. 부러지는 크레파스도 생겨나고 어떤 것은 남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조금씩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기분 나쁜 소음이 귀를 아프게 찌릅니다.
“삐거덕... 여긴 내 자리가 아닌데... 이상하네.”
“끼익... 야! 내 자리 내놔?”
“저리 가! 털썩”
“쿵쾅쿵쾅, 너나 저리 꺼져!”
밤이 깊었습니다. 크레파스들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침대에서 빨리 키를 재자고 아우성입니다. 굴뚝 청소를 한 듯 크레파스 얼굴은 참 더럽습니다. 흰색은 검은색을 뒤집어썼고 파랑은 빨강 자국이 생겼습니다. 서로 섞여 버린 것이 못내 섭섭하고 자기 자리에 남이 들어간 것이 원통합니다. 이웃도 낯설고 왠지 자리가 불편합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까? 그때가 좋았는데... 여긴 냄새가 심해”
모두들 불만이 대단합니다.
“땡땡땡... 땡땡땡... ”
종이 울리자 소란이 가라앉습니다. 대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크레파스들은 흔들거리며 못마땅한 자세로 일어섭니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쭈... 욱”
사실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번 흐트러진 크레파스들은 자기 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친구들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크기의 크레파스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부딪히고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땡땡땡... 땡땡땡... 땡... 땡... 땡...”
다시 종이 크게 울립니다. 키 재기가 시작되자 크레파스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키를 낮추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아이들은 키를 높이려고 하는데 크레파스는 자꾸 낮추려고 합니다. 엉거주춤한 모양이 참으로 우습습니다. 어떤 크레파스는 상대방 허리를 껴안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합니다. 서로 엉겨 붙은 모습이 비틀비틀 쌓아놓은 탑처럼 우스꽝스럽습니다.
“내가 제일 작다.”
빨강이 말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더 작아.”
파랑도 지지 않습니다.
“야 도토리 키 재기다.”
밤색이 점잖게 말했습니다. 밤색의 굵은 목소리가 널리 널리 펴졌지만 아무도 들은 것 같지 않습니다. 싸움은 계속되었고 침대 전체가 들썩거립니다. 싸움은 점점 진흙탕이 되고 아수라장이 되어 갑니다. 여기저기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들립니다. 피아노 건반을 아무렇게나 두드릴 때 나는 불협화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흰색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크게 외칩니다.
“어이 검둥이, 나랑 키 재 볼까!”
“뭐 검둥이... 그래 난 검둥이다. 흰둥이 넌 이번에 한 일도 없잖아. 쓸데없이 키만 크고.”
“검둥이 조용히 해. 이번엔 가을 풍경화라 그래. 너도 마찬가지고. 겨울만 돼 봐라... 우리 세상이다. 그치 얘들아...”
“웃기지 마.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없으면 말짱 헛 거야.”
화가 나자 더욱 창백해진 흰색이 검정을 마구 놀려 댑니다.
“뭐 검둥이 주제에 말이 많아. 무식한 것. 검둥이는 아무리 세수를 해도 검둥이라고...”
아 검정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사람들은 어두운 곳과 밝은 곳, 검정과 흰색을 양쪽으로 구분합니다. 왜 어두운 곳이 지옥이 되어야 하고 천당은 밝아야 하는지, 나쁜 것은 항상 검정이고 좋은 것은 흰색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이런 말도 짜증이 납니다.
“그래 잘났다. 흰둥이... 이리 와 한판 붙자.”
그들은 엉켰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데 회색이 옆에 서서 껄껄 웃습니다.
“너희들 그래봤자 소용없어. 그냥 화해해. 싸워 봤자 회색밖에 못 만들잖아. 줏대도 없이... 창피하지도 않아?”
그때 뒤에서 누군가 회색을 향해 외쳤습니다.
“더러운 회색분자.”
또 다른 소리도 들립니다.
“어이 빨갱이...”
이 소리에 빨강이 불끈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기만 보면 피하는 것 같아서 열등감에 빠져 있던 빨강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속으로 생각해 왔던 것을 악을 쓰며 마구 퍼부어 댑니다.
“붉은 악마는... 월드컵 때 너희들 모두 붉은 옷 입었지? 그래놓고 지금 뭐 빨갱이라고... 먹고 말하는 입술도 빨강. 잘 익은 사과도 빨강. 위험한 신호도 빨강... 우리가 얼마나 쓸모 있는데. 피도 빨강, 해도 빨강, 불자동차도 빨강. 빨간 김치랑 고추장은 얼마나 맛있다고... 너희들 우리만큼 할 수 있어?”
그래도 비아냥은 계속됩니다.
“그래도 넌 속까지 빨개... 원숭이 똥구멍은 빨강...”
크레파스 싸움은 점점 심해지면서 막바지에 이릅니다. 무게가 한 곳으로 집중되자 크레파스 침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넘어집니다. 균형을 잃으면서 크레파스 침대는 그만 방바닥으로 처박히고 맙니다. 순간 그들을 감싸 주던 침대보가 힘없이 흐트러지고 조각 난 크레파스들이 부챗살처럼 방안에 퍼집니다. 아기살처럼 뽀얗고 식빵처럼 부드럽던 침대보는 휴지 조각처럼 널브러졌습니다. 강한 충격을 받은 그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방 안에 흐트러진 크레파스를 본 엄마는 현윤이를 나무랍니다.
“안쪽으로 올려놨어야지. 오늘은 빨강이다.”
속이 상한 현윤이는 말없이 크레파스를 통에 담습니다. 부러지고 찢겨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크레파스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습니다. 얼굴을 찌푸리던 현윤이는 결심한 듯 말합니다.
“엄마, 이거 못쓰겠어요.”
현윤이는 주저하지 않고 통째로 크레파스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