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옛날에 서정동산 아래로 작은 동네가 하나 있었어요. 동네가 크지는 않았지만 저 언덕 넘어 아파트가 생기기 전에는 제법 아이들이 많았어요. 동네 아이들이 가끔 서정동산까지 올라오기도 했어요. 수다바람 아줌마가 그러는데 그때는 신나는 일이 참 많았대요. 아이들 얘기만 들어도 누구와 누구는 사이가 좋다는 둥, 어떤 아줌마가 애를 낳았다는 둥, 누구네가 새로 이사를 왔다는 둥, 어떤 아이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는 둥 시시콜콜한 동네 소식을 다 알 수 있었대요.
서정동산 끝자락에 그네가 하나 있어요. 동네가 사라진 뒤부터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그네는 외롭고 쓸쓸해요. 비를 맞거나 낙엽이 쌓이거나 눈이 쌓여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요. 그네는 가끔 움직여야 해요.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부러질 거예요. 까치 형제가 가끔 놀다 가긴 하지만 어디 그걸로 되나요.
“누군가 흔들어 줘야 운동이 되는데... 이렇게 허리가 아파서... 그네라고 할 수도 없겠어. 정말 큰 일이야.”
그네는 걱정이 되었어요. 어쩌다 수다바람 아줌마가 와서 소식을 전할 때만 살랑살랑 흔들려요. 그러면 그네는 허리 굽은 노인처럼 끼익 소리를 내요.
“뭐야? 왜 이렇게 삐거덕거려? 큰일나겠네.”
수다바람 아줌마도 걱정이 돼요.
아이들이 힘껏 굴러주던 그때, 날개를 단 듯 휘파람을 불며 허공을 가르던 그때가 정말 그리운 옛날이 되어 버렸어요.
“아! 그때가 좋았어. 서로들 타려고 난리를 쳤는데.”
깨끗하고 단정했던 그네는 잊혀가면서 점점 지저분해졌어요.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닦아주고 색깔 옷도 입혀 줬는데. 혼자 남겨진 더러운 그네를 누가 신경이나 쓰나요. 누군가 지나가다 그네를 보면 이렇게 말해요.
“이 그네는 칠도 벗겨지고 너무 지저분하고... 힘도 못 쓰겠는걸. 애들이 타다 다칠 수도 있겠어. 없애버리든지 해야지 원...”
없애다니요. 그네는 너무 슬펐어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외딴곳에 남겨진 철 지난 허수아비처럼 쓸쓸함이 밀려와요.
그네 앞에는 어른 허리 높이의 울타리가 있어요. 그네보다 나중에 생겼어요. 말이 울타리지 너무 허름해요. 울타리도 그네처럼 칠이 벗겨져 지저분해요. 그네와 울타리는 둘도 없는 친구예요. 서로 마주하는 그네와 울타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요. 수다바람 아줌마가 전해주는 서정동산 이야기며, 옛날 아이들이 놀러 와서 벌어졌던 신나는 이야기들... 지금은 아빠가 되었을 누군가 그네에서 떨어져 코피를 흘린 일, 숨바꼭질하다가 울타리 뒤에 숨었는데 까치 때문에 들켜 버린 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끝도 없어요. 어쩌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바람 냄새며, 구름 모양도 이야기하고, 밤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을 세기도 해요. 그네는 울타리 넘어 새로 생긴 동네를 물어봐요.
“저쪽에는 뭐가 있어? 너 때문에 안 보여.”
“미안... 옛날에 본 거 기억 안 나?”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가물거려. 많이 변했겠지?”
“정말 많이 변한 거 같아. 나도 키가 작아서 새 동네는 잘 안 보여.”
“옛날에는 온통 밭이었는데. 새로 생겼다는 큰 동네 말이야.”
“그랬지. 지금은 차들이 굉장히 많이 다니나 봐. 엄청 시끄러워.”
그네는 새로 생긴 동네가 몹시 궁금했어요.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들이 많겠지? 거기에도 그네가 있을 거야. 그네는 좋겠다. 매일 매일 신나게 하늘을 날고. 아이들이 귀여운 손으로 꼭 잡아주겠지. 아 부러워...”
“그네야. 맘 단단히 먹고 조금만 참아. 부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면 언젠가 누군가 와서 널 탈 거야. 그럼... 옛날처럼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거고, 언덕 넘어 새로운 동네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온다면 그네는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힘든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어요. 서정동산에 사는 벌레며, 풀이며, 나무들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분주하게 움직여요. 겨우내 숨을 죽이던 수다바람 아줌마의 수다도 곧 듣게 되겠네요.
“호호호, 그동안 힘들었네. 칼바람이 무서워 어디 나다닐 수가 있어야지. 이젠 봄이 되었으니 실컷 수다를 떨어 볼거나...”
봄에는 사람들이 그곳을 자주 지나가요. 봄나물을 캐는 아줌마도 있네요. 두런두런 소리가 나더니 아줌마들이 나타나요.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비닐봉지가 배불뚝이가 될 때까지 나물을 캐요.
“여기 쑥은 무공해야. 이걸로 쑥떡을 해서 식구들 먹여야지.”
“나는 쑥국을 끓일까 하는데.”
“어디 쑥뿐일 줄 알아? 여기 봐, 파드득나물, 소리쟁이, 쑥부쟁이, 광대수염, 당귀 싹, 달래, 취, 냉이, 씀바귀, 돌나물, 원추리... 없는 게 없어."
아줌마들은 나물에 정신이 팔려 그네가 있는 줄도 몰라요. 옛날 감수성 많은 소녀였을 때는 그네에 다소곳이 앉아 감상에 젖고는 했는데. 아줌마가 되어서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입을 다물 줄을 몰라요. 수다바람 아줌마도 이때만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말할 틈이 없는 거죠.
많은 사람이 서정동산을 지나갔지만 그네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어요. 그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짐하고 다짐해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누군가 와서 나를 비비고 흔들어 줄 거야. 그러면 높이 날 수 있겠지.
그렇게 봄이 지나갔어요. 유치원 아이들도 지나가고, 등산복 아저씨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네를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날은 점점 더워지고 나무와 풀들은 더욱 파래졌어요. 이제는 커다란 나뭇잎에 가려 그네가 잘 안 보일 거예요. 그럼 이번에도 힘들어지는 거지요. 그네는 몸에 힘이 죽 빠지는 것을 느껴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아요.
“아.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저기 새 동네도 못 보고. 울타리에게 말해 주지도 못하고.”
그네는 점점 희망을 잃어 갔어요.
하루는 초승달이 구름 사이에 떠 있는 밤중인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소리야 항상 나지요. 서정동산 동물들이 먹이를 찾으러 이곳을 지나가니까요. 하지만 이 소리는 다람쥐나 산토끼 소리는 아니에요. 두 발로 걷는 소리가 좀 묵직해요.
“곰인가?”
그네와 울타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해요. 아니에요, 곰은 서정동산 아래로는 거의 내려오는 법이 없어요. 그럼 뭘까?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데 희미한 달빛을 받은 시커먼 그림자는 약간 비틀거리는 것 같아요. 가까이 오는데 술 냄새가 팍 풍겨요.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얼굴을 내밀던 수다바람 아줌마는 얼른 코를 잡고는 휑하니 사라졌어요. 한 줄기 바람이 아저씨의 얼굴을 스쳐 갔어요.
“아 시원하다. 여긴 그래도 시원하구나...”
아저씨는 술병을 통째로 들이켜요.
“이놈의 세상, 그렇게 일을 부려 먹더니 하루아침에 내팽개쳐. (...) 여보, 얘들아, 미안하다. 정말 면목이 없구나.”
아저씨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네 쪽으로 다가왔어요.
“이 그네도 나처럼 맛이 갔군.”
아저씨는 아무렇게나 그네에 걸터앉았어요. 그러자 살짝 흔들리면서 그네는 “끼익” 소리를 냈어요.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조용한 밤하늘에 멀리멀리 퍼졌어요.
“끼익, 끼익... 삐거덕...”
그네는 기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어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더구나 아이도 아니고 어른의 몸무게를 지탱해야 하니 불안했던 거예요.
“그네야 괜찮아. 자신감을 가져.”
그네 마음을 알았는지 울타리가 속삭였어요. 아저씨는 술을 마시며 몸을 흔들어댔어요.
“그래 이놈의 세상. 뜨는 거야. 나만 없어지면 되는 거지.”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어요.
“끼익, 끼익, 삐거덕, 삐거덕”
아저씨가 몸을 흔들어댔어요. 그러자 가볍게 몸을 풀듯 그네가 살짝 날았지요.
“어쭈, 이것 봐라. 제법 잘 흔드는데? 그네라 이거지. 좋다. 힘껏 구를 테니 날 저세상으로 내동댕이쳐다오.”
마치 출발 신호가 울린 것처럼 아저씨는 지저분한 그네에 발을 딛더니 온 힘을 다해 굴러요. 무슨 한 맺힌 경기를 하듯이 말이죠.
그네? 그네야 너무 신이 나죠. 아저씨가 한 번 흔들자 몸을 떨며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모든 힘을 집중해요.
“삐거덕, 삐거덕... ”
하늘을 휘영청 나는데 아저씨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그네를 꽉 잡았어요.
“어쭈, 보기보단 잘나가는데.”
아저씨 목소리가 밝아지며 갑자기 힘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무릎을 굽혀 힘차게 굴렀어요.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또 한 번, 또 한 번... 그네는 가슴이 벅차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니까요.
“야호! 신난다.”
아저씨가 그네 대신 소리를 질렀어요.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아저씨가 구를 적마다 그네는 신이 났어요. 아저씨가 질러대는 소리와 그네 소리가 박자에 맞춰 화음을 만들어 냈어요. 수다바람 아줌마가 다시 나타났어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한밤중에 무슨 일인가 궁금했던 거예요. 아저씨가 외쳤어요.
“야호! 바람 한번 시원하다!”
아저씨가 다시 힘을 주어 힘차게 구르자 그네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어요.
“삐거덕, 삐거덕... 휘익...”
바로 그때, 그네는 저쪽 어두운 언덕 너머를 똑똑히 보았어요. 세상이 어두운데 유난히 그곳은 별만큼이나 환하게 빛났어요. 창문마다 빛나는 불빛들. 그 불빛 아래 오손도손 속삭이고 있을 엄마와 아빠와 아이들. 포도송이처럼 창문마다 행복이 주렁주렁 달려 있을 그곳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어요.
“야! 세상이 모두 내 아래에 있다!”
아저씨가 외쳤어요. 그 바람에 수다바람 아줌마가 깜짝 놀랐죠.
“그래! 모든 세상이 죄다 저 아래에 있는데... 내가 어쩌자고 그걸 몰랐지. 저 쪼그만 틈바구니에서 괴롭히고 싸우고 상처 내고...”
다시 그네가 힘차게 날았어요.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삐거덕...”
“그래! 날자. 날자. 날자. 어차피 한번 살아갈 세상 즐겁고 재밌게 살아보자.”
아저씨와 그네는 한 몸이 된 듯 계속해서 하늘을 갈랐어요. 아저씨 몸에서 땀이 났나 봐요. 등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어요. 그네도 뻐근했어요. 아마 내일쯤 여기저기 쑤시고 난리가 날 거예요.
얼마쯤 지났을까?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어요. 묵묵히 앉아 있던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흰 종이를 꺼냈어요.
“내가 어리석었지. 앞으로 이따위를 쓰는 일은 없을 거야.”
아저씨는 종이를 쫙쫙 찢어서 하늘에 휙 날려 버렸어요. 때를 놓칠세라 호기심 많은 수다바람 아줌마가 종잇조각을 이리저리 맞춰봤지만 웬걸 잽싼 수다바람 아줌마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종잇조각들은 하늘하늘 날더니 풀잎에 앉았어요.
“고맙다. 그네야.”
“고맙다고? 고마운 건 난데.”
“넌 보기보다 강 하구나. 내가 참 어리석었다.”
아저씨는 일어서서 따뜻해진 그네를 툭툭 쳤어요. 그리고 곧장 내려가는데 뒷모습이랑 걸음걸이가 올라올 때와는 전혀 달랐어요. 비틀거리지도 않고 어깨를 똑바로 편 채 자신 있게 걸었어요. 그걸 지켜보던 그네는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아저씨를 본 거 같기도 하고요.
“고맙다고? 허 참... 내가 고맙지... 고마워요. 아저씨.”
그네는 부르르 떨며 허공을 향해 외쳤어요. 그리고 얼른 울타리를 불렀어요.
“울타리야, 뭐 해? 자는 거 아니지?... 내가 저 너머를 똑똑히 보았어. 언덕 넘어 이야기해 줄게. 잘 들어. 모두가 어두운 데... 저곳은 너무나 밝았어... 그리고... 창문들이 줄을 맞춰 쭉 서 있는데... 창문마다 별이 빛나고... ”
재달 대는 그네의 이야기가 별처럼 밤하늘을 수놓았어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