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뜨겁던 한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지면 산속의 열매들은 바빠집니다. 여름의 햇볕을 받아 터질 듯 익어버린 열매들이 스스로 갈라져 이사할 준비를 합니다. 땀방울을 쏟아내며 뙤약볕을 굳건하게 견디어 낸 보람으로 이제 어디론가 날아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커다란 오동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한참 보아야 겨우 보이는 나무 꼭대기에 오동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오동나무 열매 삼 형제 이야기입니다.
가을 어느 날, 솔방울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지나가던 바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찰나, 쩍 소리와 함께 오동나무 열매가 벌어집니다. 열매 속에 누워있던 튼실한 삼 형제는 갑자기 상큼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자 얼른 일어나 눈을 가립니다. 잠시 후 그들은 기지개를 켜며 호기심 가득 먹은 눈으로 저 너머를 바라봅니다. 삼 형제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황홀경 자체입니다. 비자나무, 녹나무, 들쭉나무, 댕댕이나무, 눈향나무, 섬매자나무가 자태를 뽐내며 서 있고 저 멀리 높은 산 정상 쪽에는 붉고 검은 빛깔의 현무암이 장대한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삼 형제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지금은 삼 형제가 어디론가 떠나 자기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디가 좋을까? 첫째는 마음속으로 진달래와 철쭉이 넓게 퍼져 있는 남향의 비스듬한 언덕을 점찍습니다.
“형 어디가 좋을까?” 둘째가 첫째의 팔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저쪽 어때? 햇볕도 좋고 바람도 좋고... 그리고 뭣보다도 큰 나무가 없잖니?”
나무는 햇볕이 중요합니다. 활엽수는 가능한 잎을 넓게 펼쳐야 합니다. 그래야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나무에 가려 햇볕을 쪼이지 못하면 금방 시들해지고 뿌리가 약해집니다. 뿌리가 약해지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김 같은 바람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오동나무는 다 자라면 키가 상당히 큽니다. 그래서 다른 나무들은 오동나무 씨앗이 옆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씨앗이 옆에 오더라도 새싹이 자라기 전에 그늘을 만들어 죽이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클 때까지 견디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사납지 않고 키도 크지 않은 진달래와 철쭉 동산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결정한 듯 말합니다.
“저기가 좋겠다. 내년 봄만 견디면 진달래나 철쭉보다 키가 클 테니까.”
“그래! 나도 형을 따라갈 거야.”
둘째가 첫째에게 더욱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밖을 쳐다보던 셋째를 툭 쳤습니다.
“야, 왜 이리 조용해. 멋있지 않냐? 형이 저 자리 점찍었는데 우리 셋도 충분하겠어. 좋지?”
셋째는 말이 없습니다.
“거기가 아니라 저기야 저기.”
둘째는 셋째의 시선을 따라가다 손을 들어 언덕을 가리킵니다. 셋째는 아무 말 없이 까마득히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셋째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의 매력에 흠뻑 빠졌습니다.
“저기 가보고 싶다.”
“어디?”
“저기 제일 높은데.”
“후후. 거긴 불가능해.”
“왜?”
“거긴 흙이 없어서 우리가 살 곳이 못돼.”
“그건 아는데. 그래도 가보고 싶어, 좋을 거야.”
“형, 막내 왜 이래? 여기 따뜻하고 편한 곳 놔두고... 바람도 많고 뿌리내리기도 쉽지 않은 저곳에 가고 싶대.”
바람이 세차게 부는 순간 삼 형제는 껍질을 박차고 힘차게 뛰어내렸습니다. 누가 구령을 붙인 것도 아닌데 셋은 동시에 하늘을 향해 날았습니다. 둘째는 첫째의 소맷자락을 힘껏 잡았고, 셋째는 가능한 멀리 날아갑니다.
“안녕.... 안녕... 안... 녕... 녕...녕... ”
멀리서 셋째의 음성이 메아리쳐 들립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꽃이 피었다가 지고 또 피었다가 집니다. 어느새 첫째와 둘째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키도 크고 근육이 알맞게 자랐고 얼굴이 훤칠했으므로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부러워했습니다.
“너희들은 참 보기 좋아. 반듯하게 생겼어.”
오동나무 형제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냥 머리를 몇 번 흔들 뿐입니다. 대꾸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이 오동나무 두 그루는 꼭 쌍둥이 같네. 아주 멋진데.”
“이걸로 상을 만들면 아주 좋겠다.”
아! 주위의 나무들은 탄성을 자아냅니다. 나무들의 소원은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멋진 가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원은 소원일 뿐, 나무들은 대부분 땔감이 됩니다. 그런데 저 오동나무 형제는 상이 된다니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오동나무 형제는 기분이 우쭐해져서 머리를 더욱 세차게 흔듭니다.
오동나무 형제는 잔치에 쓰이는 커다란 상이 되었습니다. 형은 상판이 되었고 동생은 상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힘을 합쳐 근사한 상이 된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상을 닦고 문질러 윤이 반짝반짝 납니다.
“참 상 멋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상을 보고 칭찬할 때, 형제는 솜털처럼 부드럽던 양지바른 언덕을 생각하곤 합니다.
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아득히 멀리 날아간 셋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쯤 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셋째를 찾아가 볼까요?
오므렸던 몸을 펼치며 온 힘을 다해 뛰어내린 셋째는 바위들이 즐비한 정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에 떨어졌지만 여러 번 튀긴 다음 구멍을 피해 가까스로 흙에 도달하였습니다. 뼈마디도 아프고 상처에서 피가 납니다. 셋째는 쉴 틈도 없이 딱딱한 바닥에서 비수처럼 달려드는 사나운 차가움과 맞서야 합니다. 메마르고 차가운 흙은 성질이 사나워 셋째를 안아주기는커녕 힘차게 밀어냅니다. 셋째는 이를 악물고 바람을 부여잡고 조금씩 조금씩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받아주지 않던 흙을 향해 뿌리를 내립니다.
매서운 삭풍이 부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너무 추워 꼼짝달싹할 수가 없습니다. 온몸을 웅크리고 힘을 다해 추위를 견딥니다. 높고 높은 이곳은 봄이 와도 춥습니다. 저 아래에는 푸른 풀들이 자라고 벌레들이 모여들지만 셋째 주위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습니다. 여름도 만만치 않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메마른 땅은 사정없이 파헤쳐집니다. 심한 상처를 입은 뿌리가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통째로 떠내려 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온 힘을 다해 현무암을 부여잡고 밤새 비바람을 견디어 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셋째는 어느새 바위틈을 헤집고 햇볕을 마음껏 받으며 저 아래를 굽어다 봅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갑자기 가슴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스쳐 지나갑니다.
“아!”
셋째는 짧은소리를 내며 두 팔을 활짝 펼칩니다. 뿌드득... 셋째의 여기저기에서 소리가 납니다. 그 사이 제대로 펴보지 못한 몸은 굽을 대로 굽었고 상처투성이지만 근육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못생겼지만 누구보다도 강인한 오동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누군가 셋째를 툭 쳤습니다. 살짝 긴장한 셋째가 흘깃 쳐다보았습니다. 망태를 짊어진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셋째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노인은 턱에 손을 괴고는 셋째를 돌며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셋째는 별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가끔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었지만 셋째를 보고 놀려대기 일쑤였습니다.
“이 나무는 오동나무인데... 너무 못생겼다.”
“너무 못생겨서 식구들한테 버림받았나 봐. 이 정상에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등 굽은 것 좀 봐라.”
“너무 질겨서 벌레들이 살지도 못해.”
놀림에 익숙한 셋째는 시큰둥하여 노인을 무시하고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노인의 무릎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바로 이 나무야. 내가 평생을 찾던 오동나무야. 이 정도 단단하면 금 갈 일이 없을 거야... 다른 것들은 약해서 원... 벌레도 먹지 않아 깨끗하고... 산바람을 받아 울림도 그만인 걸... 껄껄껄 ”
손가락으로 오동나무를 톡톡 치던 노인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셋째를 데리고 산 아래도 내려갔습니다.
“이제 땔감이 되려나 보다. 후회는 없어. 제일 높은 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굽어다 보았으니까.”
셋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동안 정상에서 보았던 변화무쌍한 세상이 파노라마가 되어 흘러갑니다. 계곡을 굽이치는 운무의 행진, 햇볕을 머금은 장엄한 산봉우리, 눈이 내리면 하얀 소복으로 덮이는 산천, 단풍의 오케스트라가 엮어 놓은 형형색색의 골짜기... 살을 에는 아픔과 뿌리가 빠질 것 같은 고통이 언제든지 엄습해 왔지만 모든 것을 견디어 낸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의 앞에서는 세찬 바람도 비끼어 가고 험한 우박도 친구일 뿐입니다. 셋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평온한 미소를 짓습니다.
못 생긴 오동나무를 집에 가져온 노인은 나무를 정성껏 닦고 자르고 하여 무엇인가를 만듭니다. 셋째는 때로는 아프고 때로 간질거렸지만 잘도 참아 냅니다. 지금까지 태풍과 추위를 견디어 낸 것에 비하면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인의 땀방울이 셋째의 얼굴을 적십니다.
“봉황이 앉아도 손색이 없겠다. 이렇게 단단하고 탄력 있는 오동나무는 처음이야.”
셋째는 노인이 정성스러운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음 한쪽에서 샘솟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기쁨은 일부러 꾸민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생겨나는 바람결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긴긴밤이 며칠이고 흘러갔습니다.
오늘은 마을의 잔칫날입니다. 누군가 마을 사람을 위해 특별히 아끼던 커다란 상을 내놓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멋진 상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첫째와 둘째는 가슴을 펴며 뽐내는 몸짓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장만하여 먹고 마시며 떠들어 댑니다. 그때 누군가 박수를 치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가야금 산조를 들어봅니다.”
갑자기 조용해진 사이, 어느덧 희미하게 가야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순간 끊어지듯, 잘록하고 풍요롭고, 흐느끼고 웃는 듯, 즐겁고 괴로운 듯, 애매하고 분명한 소리가 동네에 메아리칩니다. 진정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름다운 선율에 흠뻑 젖습니다. 가야금 소리라면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었지만 첫째와 둘째도 이렇게 가슴 저미는 소리는 처음입니다. 연주가 끝났습니다. 모두들 넋을 놓아 연주가 끝난 줄도 모르고 한숨만 쉬고 있습니다. 연주자가 버선 소리를 내며 일어섭니다. 그는 엄숙히 주위를 둘러보며 떨리는 소리로 말합니다.
“이 가야금이야 말로 천하일품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가야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상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야금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서로 밀칩니다. 성격 급한 사람은 한 손이 벌써 가야금에 닿았습니다. 상은 음식으로 넘쳐 났지만 사람들이 떠나가자 금방 썰렁해졌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서로를 바라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웅성대던 소리가 자자지면서 연주자가 두 손으로 진한 밤색의 가야금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상을 치우자 그는 가야금을 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텅”
가야금과 상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볍게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 파문이 가야금과 상 전체를 진동시키자 잔치 마당은 순간 아득하고 깊은 산속이 됩니다. 온갖 종류의 벌레와 바람이 소리를 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지웁니다. 파문이 서서히 가라앉으려는데 둘째가 잠에서 깨어난 듯 다리를 떨며 소리쳤습니다.
“형, 막내야. 저 가야금 우리 막내라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