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영화 <조커>가 보여준 사라진 감정들

by 서별

<누가 빌런을 만들었는가>


세상은 늘

한 줄의 자막으로 사람을 나눈다.

환호에 고정된 히어로,

조명에서 밀려난 빌런.


누군가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오늘을 넘기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몸을 던졌을 뿐인데

결말은 언제나 한쪽만 정의가 된다.


그러나 칼을 쥔 손보다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던

당신들의 선택이 먼저 보인다.


웃음을 지운 얼굴보다

끝내 불리지 못한

본래의 이름이

뒤늦게 울린다.


그래서 묻는다.

악역은 정말 빌런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역할로 소비된

가장 불편한 진실일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는 박수 없는 무대 아래에서

다음 세계의 오해를 향해

마음을 지운 채 걸어간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멋지고 강한 히어로보다 빌런에게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들.


저는 그중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악을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언제부턴인가, 완벽한 승리보다 패배가 예정된 선택에 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의로운 결말보다 그 결말에서 삭제된 감정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영화 <조커>를 좋아합니다.

이 말은 폭력을 미화한다는 뜻도, 악역을 동정한다는 고백도 아닙니다.

다만 그 영화 속 아서 플렉의 삶이 너무도 현실적인 방식으로 무너져 가는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서 플렉은 처음부터 빌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대로 일하며 웃음을 팔았고, 사람들을 웃게 해야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병이었고, 그의 고통은 농담이 되었으며, 도움은 늘 서류 속에서 지연되었습니다.


정신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색하다는 이유로 그는 반복해서 무시당하고, 밀려나고, 조롱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에게 어떤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공감하는 것은 아서의 폭력이 아니라 폭력 이전에 이미 사라져버린 감정들이었습니다.

존중받고 싶다는 마음, 이해받고 싶다는 기대, 누군가에게라도 정상적인 사람으로 불리고 싶었던 소망.


그 감정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그에게 웃으라고 말하지만, 왜 웃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참으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얼마나 참아왔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순간은 타락의 장면이라기보다 이미 오래전에 끝났던 감정의 장례식처럼 보입니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끝내 지켜지지 못한 마음 위에 다른 얼굴을 쓰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고.

질서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 희생 속에는 이름 붙여지지 못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분노로 오해받은 공포, 집착으로 단정된 애정, 광기로 취급된 생존의 몸부림.


악역은 정말 빌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불편해하며 외면해온 감정의 최종 형태일까요.


저는 조커를 보며 "왜 저렇게 되었을까"보다 "어디까지 혼자 견뎌야 했을까"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가 빌런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끝내 구조 안에서 구제받지 못한 감정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어로는 언제나 보호받지만, 빌런은 늘 나중에 이해됩니다.

대개는 너무 늦은 뒤에, 혹은 이해받지 못할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습니다.

악역은 정말 빌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돌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마침내 말을 포기했을 뿐일까요.


이 질문은 저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답은 무엇인가요?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