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꾸며진 화원보다, 곁에 남이 있는 문장
<시선>
당신이라면
이름 모를 들꽃을 보실건가요?
아니면
잘 꾸며진 화원을 보실건가요.
저는 그저
걷다가 걷다가 지쳐 앉았을 때
말 없이
곁을 지키는
작은 풀 한 잎을
보겠습니다.
저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에세이를 싫어하는 저 자신을 오래 부정해왔습니다.
에세이는 늘 잘 꾸며진 화원 같았습니다.
고단한 시간을 견뎌냈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는 이야기.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말.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단단해지면 언젠가는 이 문장 위에 설 수 있다는 확신.
그 말들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시선은 언제나 위를 향해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도착한 자리에서 지나온 길을 설명하는 말투로.
그 문장 속에는 늘 한 사람이 빠져 있었습니다.
끝내 올라서지 못한 사람, 화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남아 있는 사람 말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과를 말할 수 없었고, '극복'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을수록 나만 뒤쳐진 것 같아 조용히 책을 덮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지치고 일이 고되면 저는 또다시 에세이를 찾았습니다.
그 모순이 싫었습니다.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 문장들 곁에 앉아 잠시 쉬고 싶어 하는 제 자신이.
그러다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싫었던 것은 에세이가 아니라 "이렇게 살면 된다" 는 시선이었다는 것을.
저는 성공하지 못해도 나다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잘 보이는 자리보다 곁을 지키는 자리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부족한 것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끝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아주 예전 이야기입니다.
에세이를 많이 읽던 시절, 제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책은 화원을 보여주지 않겠구나.
대신 길 위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심히 건네겠구나 하고.
그곳에는 저자와 정신과 의사의 대화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픔을 숨기지 않았고, 의미를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태도는 성공이라기보다 지쳐 앉아 있는 사람 곁에 말없이 남아 있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문장은 성취가 아니라 생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문장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세이를 쓰고 싶습니다.
잘 살아낸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 살아내는 중인 이야기로.
누군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글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곁을 지키는 글로.
어쩌면 이 글은 아무에게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괜찮습니다.
저는 화원을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라 걷다가 지쳐 앉았을 때 곁에 남아 있는 작은 풀 한 잎 같은 문장으로 이 페이지에 머물고 싶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