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들지 마세요

왜 우리는 어느 순간 고길동의 편이 되었을까

by 서별

<아빠는 아직 어린이였다>


우리 둘리 괴롭히지 마세요!


엄마와 나란히 앉아

TV를 향해 소리치던

어린 시절

코 끝에 향기로 스친다.


고길동 아저씨의

빗자루 든 모습이

뿔 난 우리 아빠 같아서


그렇게 무섭고 싫었는데

시간 지나보니 알았다.


아저씨는 그저

첫 걸음마 시작한 아기처럼

표현이 서툴어서 그랬다는 것을


둘리와 도우너 그리고 또치보다

그 사람의 마음이

가장 먼저 다치고 있었다는 것을.




좀 지난 이야기입니다.

둘리 40주년을 맞이해 고길동 아저씨의 편지가 뉴스에 공개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문장이 유독 오래 남더군요.


"그런데 이제 다들 제 역할을 이해한다면서요? 제가 악역이 아니라 진정한 성인이었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껄껄."


생각해보면 둘리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겁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둘리는 한 시절의 기억이고, 고길동 아저씨는 늘 둘리를 괴롭히는 못된 어른이었습니다.


어릴 적 저 역시 그랬습니다.

엄마를 잃고 떠돌다 무서운 아저씨 집에 얹혀사는 둘리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TV 앞에서 "우리 둘리 괴롭히지 마세요!"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길동 아저씨는 사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길 잃은 아이들을 재워주고 먹여주고, 아무리 사고를 쳐도 쫓아내지는 않았다고.


나라면 가능할까.

내 아이도 아닌 아이 셋을 데리고,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집에서 살아가는 일

부모가 아닌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 전 부모님과 TV를 틀었는데 우연히 둘리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에는 40년 전 그대로인 둘리와 친구들, 그리고 고길동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러웠습니다.

부모님은 세월을 고스란히 맞았는데, 화면 속 사람들은 그대로였습니다.


무심코 중얼거렸죠.

"길동 아저씨 참 고생이 많다. 나 같으면 못 키워."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 기억나? 너 어렸을 때 고길동 아저씨 엄청 싫어했어. 아빠 같다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둘리를 틀기만 함녀 TV 앞으로 뛰어들며 고길동을 말리던 아이가 나였다니.


지금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답은 하나였죠.

제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지만 나이 든 부모님을 생각하며 열아홉에 사회로 나왔던 그 선택이 책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상사에게 혼나고, 일에 치여 집으로 돌아오던 수많은 날들.

그 무거운 발걸음이 부모님이 평생 걸어온 길이었다는 것도.


이유 없이 사 오시던 맛있는 음식들과 갑자기 늘어나는 반찬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의 저는 힘든 날이면 길을 걷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봉지 하나를 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 봉지를 보고 웃는 얼굴들을 보면 다시 살아갈 힘이 납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고길동 아저씨의 빗자루와 아빠의 굳은 어깨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철이 드는 일이 아니라, 다치면서도 버텨내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어릴 적 담임 선생님처럼 숙제를 하나 내고 싶습니다.


철은 들지 말되, 소중한 것은 있을 때 지키기.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자신을 다 써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처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