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 손바닥 안이야.
참,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듯 제법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실패하는 것이 인간관계 같다.
그 중 뭐니 뭐니 해도 최고 난이도는 남녀 관계이다.
사랑인 듯 미움인 듯, 애증이라고 하기에는 그 농도가 너무 진하다.
불륜 치정극에서 나오는 복수라고 하기에는 내 감정이 너무 촌스러워 보인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나는 안다. 해외에서 열렬히 사랑해서 만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좋아하는 색깔, 옷, 음식, 영화, 드라마, 잘하는 운동 등등...
'태극기 휘날리며'를 5번 이상 보면서 어떤 장면에서 눈물을 매번 흘리는지도...
이상향은 누구인지, 화가 나는 부분은 어떤 지점인지도 너무 완벽하게 안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 사랑하고 결혼한 나는 그를 너무 아는 죄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감정의 파편들을 홀가분하게 버리고 나니 우리는 이혼을 했지만, 서로의 곁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물론, 복잡한 가정 문제들이 쉽사리 해결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자 이유기도 하지만)
어느 덧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친구처럼, 또 어떤 때는 오래된 정으로 맺어진 연인처럼.
때로는 진짜 가족처럼 서로에게 사사건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더 그랬다.
"요즈음, 또 누구야? 수상하다."
"아니야... ?!"
그의 침묵을 기다리면서 나는 아주 쿨한 척을 한다.
사실, 마음에선 이미 100개도 넘는 질문이 쏟아지지만 참는다. 참아야 한다. 냉정함을 유지하자!
내 질문에 그가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이내 배시시 웃는다. 그의 볼이 발그레진다.
대충 옷을 입는 그가 좋아하는 파란색 줄무늬 셔츠를 찾기 시작한다. 버버리 향수를 뿌린다.
그의 옆에 누군가 생겼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몇 살인데, 어디서 만났어?"
멋쩍어 하면서 그는 새로 시작한 '썸을 타는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버틸 만하다.
하지만 그의 연애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나의 오감은 총출동한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과 함께.
둘이 현재 무슨 관계야? 재혼할 거야? 손은 잡았나? 나보다 이쁘니? 어디 학교 출신이야? 어떻게 만났어? 둘이 깊은 관계야? ............
대체 어디까지 진도를 나간 거야???
전 남편의 그녀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닌 척하는 것도 힘든데, 이조차 안 하면 그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아서 최대한 내색하지 않는다.
이혼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서 마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만큼 감정의 찌꺼기들이 더 잔뜩 쌓여진 느낌이다.
그 청소되지 않은 감정들은 '사랑과 미움, 배신감'으로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