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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신드롬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은 이혼 이야기

by 꽤 괜찮은 사람



[알베르 랭슈, 1903년. 판화. [2]에 나오는 잔 다르크의 모습이다.]


화면 캡처 2025-07-28 111341.png


잔 다르크_프랑스를 구하고 샤를 7세를 왕위에 즉위시킨 잔 다르크. 귀족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었던 민중의 딸. 죽음의 비장미와 함께 오늘날까지 열세한 세상을 바꾼 강인의 여성의 대명사. [네이버인물사전]


나는 나를 뭐라고 부를까?

보통의 K-장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짠한데.


독립운동을 했던 유관순 열사, 신체적 어려움을 이겨 낸 헬렌켈러.. 근처에도 못 가지만 스스로 '강인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찾아보았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헤어 스타일과 똑같다. ) 단단하고 튼튼해 보이는 갑옷 안에서 그녀의 연약함이 숨 쉴지언정, 그녀는 강인했다.


나도 강인했다. 아니, 강인하고 싶었고 강인해야 했다. 줄곧.

내게 '강인함'은 곧 생존이었다. 너덜거리는 정신을 갖고 있어도 아닌 척 연기해야 했다.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허락하지 않은 완벽하게 무장된 요새처럼.

40이란 숫자를 훌쩍 넘은 현재의 나는 '강인함' 말고 '솔직함'에 더 끌린다.


하지만, 솔직함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솔직함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꼰대 아닌 꼰대가 되어 있고 순수하지도 않다.


하지만 철은 아직도 없음이 맞다.

철이 없어서 얻는 불편함, 불이익이 꽤 많은 것도 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늙고 싶다.

철. 딱. 서. 니. 없.게.

이것을 순수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금융 기관에 종사했던 아버지 역시, IMF를 피할 수는 없었다.

똑똑하고 사람 좋아하고, 술 잘 마시고 영업력 좋고....

아버지가 근무했던 지점은 늘 전국 1등의 명예를 놓친 적이 없었다. 잘 나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기까지 말하면 다들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가장 잘 나갈 때 제대로 넘어졌다.

뒤에서 누가 민 것도 아니고 태클을 걸어온 것도 아니다.

그냥 아버지 스스로 넘어졌다. 보기 좋게 꽈당!!


아버지의 인생을 보고 처음에는 물음표가 생겼다. 이내 곧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냥 느낌표 백만 개와 말줄임표가 공존하는 삶. 그게 내 10대 끝자락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후광을 좀 더 누리고 싶은 그 욕심을 재빨리 내려놓아야 했다.

연달아 생기는 금융사고, 팔랑귀인 아버지는 사기에 연루되고 감당 못할 빚이 생겼다.

손대면 안 될 다단계 사업, 사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알코올 중독자로 아버지는 길거리 속에서 방황하였다.

아버지를 찾으러 다닌 어느 날 새벽, 전봇대 옆에 쓰러져 있는 술 취한 노숙자를 봤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내 아버지!

'아버지'란 단어 속에 수많은 아버지들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아버지가 모두 '관식이' 같은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이 정도쯤에서 끝나면 그래도 좀 괜찮을 것 같다.

명백히 아니다. 폭력 전과자를 만나서 줄곧 가정 폭력으로 시달렸던 내 여동생의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 옆에서 함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던 내 엄마의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는 좀처럼 끝이 안 난다.

'내 가족'이란 이름 하에 이야기가 아직 넘쳐난다.


뭘 어떻게 풀어야 하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아버지가 제대로 추락한 날, 아버지는 나를 결국 시댁에 팔았다.
그때까지 내 몸값을 나는 몰랐었다.
꽤 비쌀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사채 빚 이자도 못 내는 그 불법행위에 그냥 앞가림만 하는 수단이었다.

빚을 진 사람들은 안다. 조여 오는 그 압박감을.
매일 가위눌리는 그 짓눌림을.
그래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은 분명 있다.
예컨대, 사돈들에게 거짓으로 딸을 앞장 세워
'투자금'을 받고 사채업자에게 이자를 주는.....



15년이 훌쩍 지난 그 과거 속에서 아버지를 완벽하게 용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친딸이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출생 비밀까지 궁금해할 만큼 변질되었다.

명백한 것은 그들의 친 딸, 하나밖에 없는 애지중지하는 딸인데, 나는 왜 그 말도 안 되는 사기 사건에 가해자인 듯 피해자인 듯 살아야 했을까?



그런데 그것으로도 내 이혼 사유가 충족되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내 부모의 일 이지. 내가 직접 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그럼 나는 대체 왜 이혼을 했을까??


[나는 그들의 ATM, 내 동생의 쓰레기 같은 남편과 싸워야 하는 방패. 우리 집을 살리는 잔 다르크. 강인한 K-장녀. 짓밟아도 꿋꿋하게 사는 강인한 생명력의 잡초! 그리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딸. 그들의 종갓집 맏며느리. 그리고 그 사람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


민중을 살린 잔 다르크만큼 좀 대단한 사명을 가졌음 덜 초라했을 내 삶.

나는 내 삶이 퍽퍽해질 때, 내 부모로 인해서 눈물지었을 전 시부모님,

그리고 시댁 식구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한다.

돈을 빌려주었던 외가댁 식구들과 지인들에게도 용서를 빈다.

이것이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지고 가야 한다.


자고로 십자가는 질질 끌면 안 된다.

질려면 제대로 바짝 매고 가야 덜 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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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는 진짜 솔직해지고 싶다.

나는 아직도 내 부모의 그때 그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기 창피할 만큼 그들을 외면하고 싶다.

나는 그들의 딸이길 거부하고 싶다. 나는 잔 다르크가 아니다.

K-장녀, 그거 개나 줘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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