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종달새 Aug 18. 2024

재혼 회사의 남자들

빛보다 빠른 어른의 만남

첫 번째 미팅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색했고, 무엇보다도 당연히 나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거라고 여겼던 나의 상상을 무참히 무너뜨렸던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전 남편을 향한 복수의 칼날이 뜻하지 않게 나를 향한 자존감 하락으로 변해 버렸다. 생각 같아선 다음 만남 자체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재혼 회사의 상담 실장은 두 번째 남자와의 미팅을 바로 잡았다. 솔직한 마음은 환불할 수 없는 350만 원 등록비 때문이었다.


 유난히 한파가 몰아치던 12월, 강남 한 복판의 자리 잡은 통창의 커다란 카페에서 나는 두 번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보다는 다소 덜 화장을 했고, 마음의 부담감도 덜어 냈다. 두 번째 만남의 목표는 아주 간단했다. 첫 번째 만남 이후의 떨어진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00 씨, 이번 남자분은 아주 자기랑 잘 맞을 거 같아요. 학벌도 너무 좋고, 성격도 좋으시네. 자기랑 코드도 잘 맞을 거 같아. 잘 생겼고, 공기업 나오셔서 사업하는데.. 성수동에 집이랑... 아버지가 재력가이시네. 교육가 집안에... 아이는 어리고 엄마가 양육해요. "

상담 실장의 지나친 투머치 토크에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그 와중에 '잘 생김, 성격 좋고 학벌도 좋은 재력가' 란 이미지를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속물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멋지게 전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 이름 모를 첫 번째 남자에게도.



 차가 막혀서 조금 늦는다고 전화 온 두 번째 남자의 중저음이 나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에 나는 카페 안에 사람들을 관찰했다. 신기하게 내 주변 테이블에선 소개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 이 카페가 소개팅하는 곳으로 좀 괜찮나 보네.'


 내 바로 앞 테이블에선 소개팅을 하고 있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글래머스한 여자는 가슴골이 움푹 파인 블라우스와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크게 관심 갖지 않는 듯한 눈길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열심히 말하고 있는 남자와 때때로 입을 가리면서 웃는 여자. 그들의 대화는 좁은 카페 안에서 내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대학원생인 여자와 얼마 전 개업한 의사인 남자. 그들은 서로의 조건에 굉장히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매는 카페 안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단연코 최고였다. 남자는 여자가 눈치 못 채게 그 엄청난 몸매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지적인 듯한 이미지로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의 입이 자꾸만 귀에 걸리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여자를 보니, 미니스커트를 입고 작은 키를 보완하려 한 나의 의상이 갑자기 초라해 보였다.

거울을 보니, 엉성한 화장 속 눈가 주름이 눈에 보였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  두 번째 남자가 카페 안에 들어섰다.



아뿔싸!

 큰 키에 깔끔하고 센스 있는 슈트, 재력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모르게 뿜어 나오는 여유와 자신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남자는 나를 찾으면서 대단한 몸매의 젊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첫 번째 남자보다 훨씬 더 아주 괜찮았다. 역시 사람은 시각적인 동물이었던가?)




상담 실장 말처럼 모든 것이 다 적중했다.

나와 두 번째 남자는 첫 만남치곤 꽤나 이야기가 잘 통했다. 다만 이성적인 느낌이 아닌, 편한 친구 같은 대화가 이어져갔다. 사업 이야기부터 현재 공부하고 있다는 영어 이야기까지 잡다한 어른들의 수다가 펼쳐졌다. 편하다고 느껴서인지 그 남자가 수위 높은 농담을 하였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나는 대놓고 불쾌함을 표현할 만큼의 여자도 아니었다. 어색하지 않으려 나는 최대한 많이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소 격한 리액션을 했다. 그만 좀 하라는 무언의 신호를 남자는 역시 못 알아들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남자는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았다.


'뭐지? 원래, 재혼 회사 소개 만남은 이렇게 진도가 빠른 거야?'

남자의 농담이 점점 더 거세졌고, 살짝 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어떤 여자들은 만나자마자 술 먹으러 가자고 그러더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 너는 상상도 못 할걸.




갑자기 전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혼 회사의 여자들이 얼마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고, 가치관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려 주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어필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단순히 만남 자체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모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촌스러울 만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직업병일까? 아니면, 아이들의 엄마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몸 안에 장착된 것일까?

나에게는 No를 강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다.

복수란 이름 하에, 나름 거액을 들여서 재혼회사에 등록을 했지만 준비조차 안 된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 내 손을 잡고 젠틀함 속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하고 있는 그의 미소.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많은 것을 알아가자는 그의 이야기가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서둘러 카페를 떠났다.


'내가 이런 인간을 만나려고 이 짓을 한 거야?'




그 뒤로 나는 내가 낸 돈이 아까워서 의무적으로 만남을 했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나이 어린 사람도 만나 봤다.

첫 만남 빼고는 모두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떨어졌던 자존감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남자들 역시, 의무감이나 지극히 상대방을 존중해서 전화번호를 묻고 다음 만남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말 통하는 이성 어른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누구와도 한 번 이상의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새로운 그들과 더 많은 대화를 이어 가면서 살아가는 내 삶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덜 외로운 것 같다.

남편에 대한 복수도 자존감 회복도 결국 내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건으로 흘러갔다.

나는 아직 그런대로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현재까진.......




모르는 남자와의 첫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익숙해질 무렵, 나는 내 마음을 알아 버렸다.

 아직도 전 남편을 못 잊고 있다는 것을.

찌질한 만큼 내 사랑이 답답한 것도 더불어 알게 되었다.

어쩌겠나? 이 답답한 것도 나 인 것을.


이전 03화 재혼 회사 소개의 첫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