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오해를 풀다

끈기

by 김효숙

내 고집, 내의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 호숙이는 어질고 착해서 고집도 없었다” 엄마가 종종 자랑삼아 하시던 말이다.

언제가부터 내 욕구를 무참히 뒤로 밀어두고, 엄마 원하는 시키면 저항도 거절도 못하고 하라는 대로 살았다.


젖먹이 때 다리를 데여 걸음마가 남다르게 늦었다고 들었다. 어릴 적에 우리 집은 생계형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걸을 수 없다 보니 가게에 진열된 과자, 과일을 빤히 바라만 봤다. 먹고 싶어 울고 보채면 엄마는 결국 팔지 못하는 ‘파치’를 내게 주었다. 막음직한 제대로된 과일을 원했는데 늘 상했거나 못생긴 과일을 먹어야 했다. ‘파치’를 입으로 가지고 가면서 눈으로는 제대로 된 과일을 뜷어지게 보면서 먹었다. 그 습관 때문인지 사시가 되어버렸다. 동네아이들에게 ‘사팔뜨기’라 놀림을 받으면 분하고 서러웠다.


첫걸음을 떼고 걸음마가 시작되었을 때, 처음으로 필려고 진열해 놓은 제대로 잘 생긴 토마토 한 개를 덥석 쥐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흡족해 하면서 맛에 집중하고 있는데 엄청난 날벼락을 만났다.

아버지가 고무장갑만한 어마한 손으로 내 빰을 후리쳤다. 울 겨를도 없이 기겁하며 그 자리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하면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그날 두려움과 불안의 공식이 내 안에 새겨졌다.


아버지의 엄벌이 있었던 뒤로 가게에 차려 놓은 물건은 결코 임의대로 먹지 않았다. 친구들은 속도 모르고 “너희 집은 과자 가게 해서 좋겠네” 부러워들 하던데 영 아니었다.

‘파치’라도 골라 줄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아이로 살았다.


여섯 살 되던 어느 날 고무 줄 놀이를 처음 한 날이었다. 아직도 걸음이 서툴러 정식으로 편짜기 게임에는 끼워주지 않아 나보다 어린 6촌 동생과 나무 기둥 한쪽에 고무줄을 매어 놓고 놀이를 시작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내가 져서 먼저 고무줄을 잡는 술래로 고무줄 뛰기가 시작되었다. 순번대로 몇차례 했는데 재미가 없었는지 그 아이가 잡을 차레인데 그만하자고 했다. 내 차례까지 하고 마치자고 했다. 내 머리에는 게임의 규칙과 지켜야 하는 원칙이 선명했다. 잡아달라고 했다. 당연한 주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아인 횅하니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아이 집 앞에서 “내 차례다. 잡아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기척이 없자 울분을 터뜨리며 끝까지 요구했다. “내 차례다, 잡아도, 내 차례다~~~” 그 집앞에서 얼마나 울며불며 부르짖었던지 5촌 당숙님이 나오셨다.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흑흑’ 흐느끼며 그래도 또박또박 내 정당한 요구를 말씀드렸다.


당숙님이 “그래 참, 니말 맞네, 아제가 잡아 줄테미 니차례니깐 해라”하시며 고무줄 한쪽을 잡아 주셨다. 눈물을 훔치며 정당하게 생각되었던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 다짐했다. 고무줄 놀이는 절대 하지 않을거라고.. 그 뒤로 고무줄 놀이를 하지 않았다. 규칙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아이들과 싸우면서 노는 것은 괴롭고 너무 힘들었다. 그냥 정해진 규칙 없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노는 소꿉놀이가 훨씬 편하고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수제비가 먹고 싶었다. 엄마에게 수제비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우리 집은 반찬도 파는 구멍가게라서 엄마는 식사시간 즈음에 손님이 많아 정말 바빴다. 엄마는 지금은 지어 놓은 밥 먹고 나중에 끓여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하면서 미루는 엄마를 믿을 수 없었다. 특히나 지금 먹고 싶어 기다릴 수도 없었다. 큰 소리로 울면서 계속 엄마에게 수제미 끌어달라며 떼를 쓰며 매달렸다. 엄마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만해라며 마구 때렸다. 더 엉겨붙으며 끝까지 ‘수제비. 수제비’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때 할머니는 평소에 엄마를 원수처럼 미워하셨다. 나를 때리는 엄마에게 온갖 욕을 퍼부으며 나를 달래주고 수제비 반죽을 해 주시면서 끓는 물에 수제비를 같이 떠 넣게 했다.

밀가루가 수제비로 변해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금방 울음이 그쳤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차 수제비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떠 넣었다.

그날 할머니와 함께 만든 수제비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도 수제비를 좋아하고 요리도 재미있어한다. 우리 엄마는 이런 나를 미워할 것 같았지만 발악 수준으로 화를 왕창 내고 나면 그냥 뒤가 없었다.


어느 봄날의 치마 사건은 평생 나에게 상처와 그림자를 남겼다.


다섯 형제를 낳고 산후조리를 한번도 못한 엄마는 산후풍으로 몸이 시리다며 여름에도 내의를 입을 만큼 추위에 시달렸다. 당신이 추운데 겨울이면 우리 형제들에게 옷을 겹겹이 입혔다.

그렇지 않아도 걸음이 서툴러 잘 넘어지는데 옷으로 둔해져 내 바지 엉덩이 부분은 항상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똥 묻었네” 하면서 놀리곤 했다.


지겨운 겨울옷을 훌훌 벗어 던질 수 있는 따뜻한 새봄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날이 상큼한 따뜻한 봄날이었다. 새봄에 엄마가 만든 주름치마를 잘 다려 입고 마음껏 자랑하고 싶었다.


엄마는 장사하고 바쁜 틈에도 자녀 옷을 손수 지어 입히곤 하셨다. 바빠서 계절이 지난 옷은 무조건 보따리로 싸놓아, 입으려고 막상 꺼내면 구김으로 엉망이었다.

옷더미에서 주름치마를 찾아 들고 엄마에게 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오늘은 바지 입고 가라”고 했다. 바로 입고 가고 싶어 엄마에게 재롱을 부리며 주름치마를 다려 달라고 애원했다. 무거운 무쇠다리미를 들고 애교도 부리고 보채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엄마는 심하게 역정을 내며 막무가내로 바지 압고 가라고 강요했다.

나는 “학교 가지 않겠다”고 공갈을 쳤다. 엄마는 내 공갈에 울화가 치밀었는지 발작적으로 나를 밀치며 학교 다니지 말라고 했다.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치마를 쥐어 비틀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야간근무를 하시고 지친 몸으로 퇴근해 아침에 집에 왔다. 쪼그리고 앉아 징징거리며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뒤숭숭한 집분위기에 화가 치밀어 “장사 집어 치우고 아이 치마 다려 줘라”고 엄마에게 고함을 질렀다.

엄마는 더 격노하며 ‘꺽꺽’ 울고 있는 내 머리채를 쥐어뜯고 발로 찼다.


아버지 눈이 호랑이처럼 변하면서 동시에 손으로 시꺼먼 무쇠 다리미를 번쩍 들어 엄마에게 던져 버렸다. 다리미가 엄마 뒷통수를 그대로 내리쳤다.

순간, 엄마 머리가 피범벅이 되었다. 검붉은 피가 머리카락 줄기를 타고 ‘뚝뚝’ 떨어지고 목줄기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엄마, 엄마 죽으면 안돼, 다음부터는 절대절대 고집부리지 않을께’ ‘내가 엄마를 죽이는구나’...


우리 아랫집 약방아저씨께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가서 울엄마 살려 달라고 애웠다. 약방아저씨가 급하게 오셔서 엄마 상처를 기우면서 따뜻한 목소리로 ‘호숙아, 니 엄마 안죽는다. 걱정하지 말고 학교 가라“”고 하셨다.


엄마에게 너무 죄송해서 바지를 입고 가방을 들고 무거운 걸음으로 학교에 갔다.

교실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막상 학교를 파했는데 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엄마에게 미안하고 아버지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찌...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었다.

천근만근! 집으로 향한 발무게가 절절히 느껴졌다.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와서 보니 엄마는 머리에 붕대를 매고 여느 때와 같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예전 모습 그대로 별다름이 없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하얗게 시간을 보내었는데, 그때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황당하고 뻘쭘했다. 그 날 이후 엄마가 하라는대로,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았다. 살아난 엄마의 정서적 노예가 되기를 내가 선택했다.


나를 돌아보는 글을 쓰며. '내 안에 끝까지 해내는 끈기, 버티는 큰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끈기 있는 사람이구나‘ 이 강점의 발견은 반갑고 정말 경이롭다.

이제는 내 안에 끈기를 올바르게 알고 선하게 발휘하며 남은 삶을 살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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