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아이스캐키의 여름
달걀아이스캐키의 여름
유난히 무더웠던 어느 여름, 친구가 “야, 우리 어릴 적에 먹었던 달걀 아이스캐키 기억나?”하고 물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이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때, 우리 엄마는 사투를 벌리며 달걀 아이스캐키를 만들어 팔았다. 단단하고 차갑고 새콤달달한 달걀 아이스캐키는 그 시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얼음과자였다. 그 여름.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달걀모양의 차가운 얼음과자를 사 먹으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달걀아이스캐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달걀 반쪽의 알루미늄 주물로 틀과 병목과 입구가 있는 다른 반개의 틀을 하나로 맞추어 이음새는 널찍한 고무 밴드를 채웠다. 그 병 입구로 오렌지, 파인애플, 딸기의 과일향과 색이 나는 인공 감미료를 물에 섞어 병입구로 붓는다. 채워진 병에 까만 고무 병뚜껑 안쪽에 이쑤시개처럼 생긴 나무 막대를 끼워 병투껑으로 단단하게 틀어막는다. 그리고 커다란 프랑스 와인 술통처럼 생긴 나무통에. 송곳을 세워 놓고 망치로 내리쳐 쪼개진 굵직굵직한 얼음덩어리를 넣고, 굵은 소금 한 되박을 붓는다. 여기에 한 개씩 만들어 둔 달걀 아이스캐키 주물을 넣고 술통 뚜껑을 닫으면 준비 작업이 끝난다.
이제, 쪼그리고 앉아 나무 술통을 앞으로 당기고 뒤로 밀치는 방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 단단하게 얼은 달걀아이스 캐키가 만들어진다.
완전 수동식으로 완성된 새콤달콤하고 차가운 아이스캐키는 그 시절, 무더위를 잊게 하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나는 얼음에 소금을 왜 넣는지 궁금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달걀아이스캐키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야’라고 딱 잘라 대답을 하셨다.
나는 뻔한 답으로 궁금증과 호기심이 해소되지 않아 질문을 계속하면, 엄마는 역정을 내며 버릇없이 어른에게 따진다고 몰아세우고 나무라셨다. 풀지 못한 문제는 속상한 가슴에 잠시 묻어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문제도 잊고 궁금증도, 호기심도 사라졌다.
지금은 어른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즉시 인터넷으로 질문하면 얼마든지 자세한 설명과 답을 찾을 수 있는 참 편리한 세상이다.
그 당시 달걀아이스캐키를 만들어 파는 어른들은 구체적인 원리는 설명할 수 없었어도 과학의 원리를 실제로 적용해 열광적인 인기 상품을 만들어 낸 지혜는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 좁은 골목길 달동네, 작은 가게에서 파는 달걀아이스캐키를 사기 위해 열선 줄이 끝없이 길었다. 빨리 팔려고 성급하게 꺼내면 얼지 않아 단물만 흘러버려 엄마는 금전적 손실에 안타까워하셨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고객이 많아지자 떼돈이나 버는 것처럼 여겨졌는지 금방 경쟁가게가 생겼다.
우리 바로 윗집은 영도 조선공사에서 깡깡이 작업반장인 아저씨가 한 집에 아내 둘, 큰 아줌마와 작은 아줌마와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이 예매한 집이었다.
그 댁의 두 아줌마가 힘을 합해 달걀아이스캐키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엄마와 처첩, 두 아줌마의 1:2 경쟁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혼자서 얼리는 속도로는 이길 수 없어 가격을 내리기로 했다.
그 집의 반값이라고 외치며 달걀 아이스캐키 통을 마구 돌렸다. 가난했던 시절, 가격경쟁에 무조건 이겨 우리 쪽으로 손님이 몰렸다.
그 집도 가격을 내려 다시 속도 경쟁을 해야 했다. 엄마는 아꼈던 우리 다섯 형제를 동원해서 달걀아이스캐키 통을 굴리게 하고 맛보기도 주가며 호객 행위도 했다.
치열한 경쟁 중에 더위가 한풀 꺾여 얼음과자를 찾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손님은 줄어들었지만 경쟁에 시달렸던 엄마는 과로로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하혈, 과다출혈로 생사의 갈림길을 만났다.
입추, 가을비가 왔다.
그날 아침, 윗집을 보러 나갔더니 그 집 닫힌 문 앞 위 처마 끝으로 빗줄기가 떨어졌다.
문 앞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비 맞은 쌀밥 한 그릇과 빗물에 젖어도 앙상하게 마른 북어 한 마리가 차려진 밥상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 집 작은댁이 목매 죽었단다.
한 철 장사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잊고 지낸 둘째 부인, 얼마나 더 되돌아온 현실의 직면이 힘들었으면 그분은 견디기 어려운 생을 마감하고 이승을 떠났다.
경쟁을 마친 우리 엄마는 방 안에 놓인 하얀 사기요강에 앉아 피를 쏟았다.
그 때 언니는 초등 3학년, 나는 2학년이었다. 엄마는 요강을 비울 힘도 없어 언니와 내가 순번대로 요강을 비워야 했다.
내 차례에 요강을 들고 도랑에 비우러 나갔는데 피가 무섭고 역겨웠다. 무엇보다, 누가 볼까 봐 부끄러웠다.
엄마는 피가 흥건한 면 생리대 뭉치를 언니에게 빨아 오라고 시켰다. 아버지는 엄마가 죽을 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혀 가슴을 부여잡고 떨고 있어 집안 전체가 암울했다.
칠흑 같은 집안 분위기에 주눅이 든 언니는 엄마 시키는 대로 대야에 피가 고인 면생리대를 담아 머리에 이고 나를 데리고 개울로 갔다.
개울 도착해 피빨래를 넣자마자 붉은 핏물이 번져 나갔다. 주변에 빨래하러 나온 어른들이 야단들이었다. 사정도 모르면서 엄마 욕을 하고, 흉을 보며 수군수군 거렸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얼른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으나 언니가 빨래를 끝낼 때까지 버티려니 가슴은 두근거리고 조마조마하더니 결국 힘이 쭉 빠져버렸다. 일어날 힘도 없었다.
아주머니들이 쑥덕거려도 언니는 씩씩하고 다부지게 빨래를 했다. 핏물은 빠졌지만 아직 핏자국 얼룩이 남은 빨래를 꼭 짜서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당당하게 집으로 향했다.
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군거리는 아줌마들이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 참고 가슴에 담아둔 울화를 내게 터뜨리며 느림보라며 소리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운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아픈 목소리로 언니에게 씻어온 빨래에 다시 비누를 묻혀 알루미늄 세숫대야에 넣고 삶으라고 했다. 대리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해낸 언니는, 그 당시 영양실조로 굉장히 허약한 체질로 깡마른 아이였다.
며칠 후 또 비가 왔다. 그 날 아침도 저번과 똑같이 윗집 처마 밑에 처량한 비 맞은 밥상이 놓여 져 있었다. 작은댁이 간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큰댁이 음독자살을 한 것이다.
이 분은 왜 갔을까? 죄책감이었을까?
작은댁의 죽음과 죽어가는 경쟁자의 비애를 견디기 어려웠을까?
엄마는 눈이 초롱초롱한 다섯 형제를 두고 죽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간힘을 다해 살려고 애썼다. 엄마는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다리를 저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아 용하다고 소문난 한약방에 갔다. 그곳에서 한의사의 지맥을 받고 난생처음으로 한약을 지어 왔다. 아버지가 재래식 약탕기를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정성을 다해 한약을 다렸다. 집 안 가득히 채운 그 한약 냄새는 아직도 지울 수 없다.
가족 모두와 함께 엄마를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 후 엄마는 숨도 쉬지 않고 쓴약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드러누워 버렸다. 엄마 눈에 눈물이 흘렀다. 엄마의 눈물은 어린아이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게 했다.
명의의 약발로 엄마의 하혈이 멈추었다. 엄마가 조금씩 회생하기 시작했다. 아랫집 약방 아저씨가 집에 와서 피대용품 주사(링거)를 놓아 주셨다. 그 뒤로 빈혈 보강제를 계속 드시면서 일어 나셨다. 그 분은 또 다시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의 전선에서 투철하게 싸우며 일하셨다. 새벽시장에 가서 채소를 받아 반찬을 만들어 파는 반찬 가게를 열었다. 우리 엄마는 빈곤을 뛰어 넘기 위해 당신의 몸을 갈아 바치고 가신 생의 대전사이셨다.
수 세월이 지난 불잉걸 같은 여름, 아파트 근처 빙수 가게에서 팥빙수 한 그릇을 사먹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만삭된 몸으로 손님을 단한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 빠르게 움직이는 빙수 가게 주인의 모습에 그 여름 달걀 아이스캐키를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온 식구가 몸부림쳤던 장면이 겹쳐지며 아련하게 마음이 저려온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윗집 두 아주머니까지 모두 치열하게 살다 가셨다. 그때 어린소녀로서 다부지게 대리모 역할을 언니는 지금도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글쓰기를 통해 소중한 삶을 살려고 애쓰셨던 모든 분들게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