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장수
만학도 대학원생인 제자가 나를 보러 집에 왔다. 그녀가 부산국제영화거리 BIFF 광장 먹자골목을 지나는데 포장마차 앞에 씨앗 호떡을 사려고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걸 보고, 얼마나 맛이 있기에 이럴까? 궁금한 마음에 그녀도 합류하여 한참 기다린 끝에 씨앗호떡을 샀다며, 기름이 배여 나온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 봉투 속에는 단지 호떡만이 아니라, 그녀의 귀한 시간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작은 것에 곧잘 감동을 표현했던 제자의 선물에 별 표정 없이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걸 사오니? 잘 먹을 께” 짧게 얼버무리며 받은 봉지를 식탁 가장자리에 놓아두었다. 순간 그녀가 무색해 하면서 “혹시 호떡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제야 허둥지둥 대답을 고쳐 붙였다.“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오래 줄을 서서 사온 귀한 호떡인데, 다만 호떡은 뜨거울 때 꿀을 줄줄 흘리면서 먹어야 제 맛이거든, 지금은 식었으니... 아껴 두었다 나중에 먹을께.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봉투에서 호떡 하나를 꺼내어 분해하기 시작했다. 마가린 기름에 지져진지 오래라 온기 없이 딱딱해진 호떡을 열었더니 그 안에 녹지 않은 까만 설탕, 해바라기씨앗, 다진 땅콩과 아몬드, 검정깨로 속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겨울철 인기 있는 일명 씨앗호떡이다.
나도 여고 시절에 호떡 장수였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일 년 내내 기계를 돌리며 살림과 생계를 꾸려가셨다.
고춧가루를 빻고, 미숫가루를 갈고, 국수를 직접 뽑아내고, 참깨를 눌러 기름을 짜내어 팔았다. 겨울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호떡 장사까지 더해졌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해내셨다.
이른 새벽부터 어머니는 지게문을 열어젖히고 자녀들이 아직 잠자고 있는 방안에서 그 날 팔 호떡 반죽을 했다. 20kg 중력분 밀가루 한 포대를 뜯어 큰 대야 3곳에 나누어 부을 때 방 안은 밀가루가 풀풀 날렸고 금방 뿌연 가루로 덮인 창고가 되었다. 다 된 반죽은 발효와 숙성을 위해 무명 베 보자기를 덮어 아랫목에 놓고 이불을 덮어 묻어 두었다. 반죽대야가 이불 밑으로 들어오면 잠이 덜 깬 우리 형제들은 아랫목을 내 주기 싫어 투덜댔다.
오전에 참기름, 고춧가루, 국수를 찾는 손님이 없을 때 어머니는 우리 자매에게 호떡 굽기 시범을 보이고 호떡 굽는 기술을 가르쳤다.
점심식사 전후부터 반찬가게에 손님이 붐비기 시작하면 호떡 장사는 여고생이었던 언니와 나의 몫이다.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온갖 먹거리 장사를 해 온 터라 일손이 모자라면 다섯 형제 모두 일꾼이다.
달동네 골목 안에 숨어 있는 우리 가게에 파는 모든 원재료는 도로까지 나가서 손수 배달을 해 와야 했다. 밀가루, 마른고추 큰 포대를 싣고 온 차가 도로변에 놓고 우리 식구모두가 이고 지고 날랐다. 가문의 역전을 기대하며 우대받았던 장남 오빠도 짐을 나를 때는 제외되지 않았다. 20Kg 밀가루 포대, 60Kg이상 되는 마른 고추가 든 큰 짐은 오빠의 몫이다. 지금도 키가 작은 오빠는 무거운 짐으로 눌려져 자라지 못했다며 넋두리를 곧잘 한다. 그래도 오빠에게 장사는 시키지 않았다.
성격이 급하고 깔끔한 언니는 호떡 반죽 만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손에 반죽이 묻을까봐 재빨리 어슬프게 모양을 만들어 벌레 떨어뜨려 버리 듯 철판에 얹었다. 자꾸 뒤집고 누르다 호떡이 터져 액체 된 끈끈한 흑설탕이 빠져나와 타면서 연기를 내면 거칠게 짜증을 냈다. 엄마는 오는 손님도 쫒는다며 설거지나 하라고 혼을 내곤 하셨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호떡 만들기를 잘 배워 어머니보다 더 맛깔나게 호떡을 구워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정성을 다하여 기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도 덩달아 재미있어 웃었다. 작품 같은 호떡이 나오면 얼른 어머니께 가져다 보여드려 큰 칭찬을 받았다.
신나는 여고생 호떡 장수가 되었다. 그 때 우리 가게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호떡 손님이 많았다. 사실 어머니의 반죽, 막걸리를 넣고 적당하게 숙성한 호떡 반죽이 일품이었다. 밀가루 단백질의 발효가 적당하여 기포가 균일해 금방 구운 낸 호떡은 인절미처럼 쫄깃쫄깃 하고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아 빵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그 당시 우리 형제는 모두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학벌에 한을 품고 자식에게 우수한 학력을 기대하셨다. 공부 실력을 쌓은 데는 독서가 제일이라며 장서인 세계문학전집, 한국장편, 단편전집을 월부로 구입하고, 단행본은 직접 서점에서 사서 날랐다. 월간 문예지도 구독해 보았다.
그 해 나는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기로 마음먹고 호떡을 구우며 틈틈이 장편 소설을 읽었다. 마른 수건을 곁에 두고 가끔씩 비닐 책표지에 묻은 식용유, 손에 묻은 기름을 그 타월로 닦곤 했다.
어느 날 앙드레 지이드의 「좁은 문」을 읽고 있을 때다. 우리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심방을 오셨다. 책을 들고 호떡 굽는 나를 보며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좁은 문」을 읽고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대답했다.
나는 계속해서 호떡을 구워 팔았고 목사님과 사모님은 방 안에서 엄마와 함께 심방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난 후 내가 구운 호떡으로 대접했다. 방에서 나온 목사님이 나를 보며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셨다. 연민으로 느껴져 왠지 부끄러웠다.
주일이 되어 여느 날처럼 학생부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방학에는 목사님은 매주 학생들에게 성경 과제를 주시고 지난 주 과제를 챙기셨다. 그 주일 과제를 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목사님은 큰 소리로 “방학인데 여러분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어요. 호떡을 구웠나요?” 경상남도 출신인 목사님은 ‘효’ 발음이 안 되어 “호숙이는 호떡을 굽습니다. 호떡을 구워 판다고 숙제를 못하는 건 이해되지만 여러분은 도대체 뭘 합니까? 호숙이는 호떡을 구우면서 세계 명작을 읽어요. 호숙이는 호떡을 굽습니다.” 호숙과 호떡이 번갈아 나올 때면 아이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 무슨 난처한 상황인가? 얼굴이 달아올랐다. 설교와 폭소, 너무 황당했다. 무장하고 감싸고 있었던 수치심에 직격탄이 날아와 내 모양이 산산조각나 버렸다. 힘이 쭉 빠져 표정이 사라지고 멍했다. 초라하고 불쌍했다. 몽롱한 가운데 예배가 마쳤는데 낯간지럽고 참담해 일어 설 수 없었다. 성난 목사님이 사라지자 아이들이 연달아 ‘호숙이는 호떡을 굽습니다.’ 개걸스럽게 흉내 내면서 폭소와 배꼽 잡는 시늉을 했다.
지금은 내 안에 스토리를 내어 놓고 배려 받지 못했던 그때 호떡의 애환을 털어 내고 싶다.
'누가 뭐래도 일어나리라'
불현듯 대박 난 씨앗호떡 주인과 엄마표 호떡의 질로 겨루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간다. 그때는 불평하며 관심조차 없었는데 호떡 반죽 비법을 어머니로부터 자세히 전수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