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시간
먹장구름 낀 하늘에서 연일 비가 내린다.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도 덩달아 눅눅해지고, 애잔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빗줄기와 함께 마음의 창밖으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둘째가 백일도 되지 않았고, 첫째는 다섯 살 유아원에 다닐 때였다.
산후조리 직후라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학교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지쳐 있었다. 그저 푹 쉬고만 싶었다.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아이 둘은 친정엄마가 돌보고 계셨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도 어린 손주들을 돌보다 지쳐 내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셨다. 학교에서 곧장 친정으로 가 아이들을 넘겨받아 집으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된 몸으로 또 하루를 마감하는 고된 가사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를 업고, 유아원에서 돌아온 큰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멀고 무겁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유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
흙투성이 원복 차림에 유아원 가방을 멘 딸아이를 보는 순간, 억눌렀던 화가 치밀었다.
아침에 곱게 빗어 주었던 머리칼은 삐죽삐죽 튀어나와 초라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얘가 유아원 버스를 안 타고 걸어서 왔단다. 아가 안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집에 가서 좀 따끔하게 혼내줘라.” 역정 섞인 친정엄마의 말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둘째를 얼른 눕혀 놓고 큰아이를 다그쳤다.
“왜 버스를 안 탔어? 도대체 뭐 하다가 놓친 거야?”
아이의 가방을 낚아채 열고 손을 넣었다.
손끝에 잡히는 낯선 감촉—가방을 거꾸로 털자, 흙 부스러기와 함께 빙과류 나무 막대가 수두룩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과 지금의 현실이 겹쳐지며, 내 안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마그마 같은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
내 어릴 적, 종이 줍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다 돌아왔을 때 엄마에게 두들겨 맞으며 들었던 그 말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왜 이런 걸 주워 오냐! 남들이 먹다 버린 막대를 왜 줍는데?
니가 거지냐?”
그때의 억울함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나는 마치 그때의 엄마가 된 듯, 내 아이에게 고스란히 쏟아냈다.
딸에게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내 분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었고, 나는 아이를 마구 다그치며 소리쳤다.
“아이고, 미치겠네! 유아원에 보냈더니 산길로 다니면서 이런 짓이나 하고…
손 좀 보자! 이렇게 더러운 걸 주워 다니니 이 손 봐라!
옷도 너처럼 지저분한 애들이 있더냐?
이래 다니면 친구들이 너 보고 좋아하겠니? 또 이럴 거야?”
절규하듯 고함을 지르는 내 앞에서 딸아이는 엄마의 감정 폭풍에 휩쓸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잘못했어요,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 어린 목소리는 눈물과 함께 떨렸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던 어린아이에게 턱없는 처벌을 내린 가슴 아픈 날이었다.
그날 이후 딸은 유아원에 가길 싫어했다.
친정엄마는 “억지로 보내지 말자”고 하셨고, 결국 우리 딸은 유아원을 중퇴하고 말았다.
대신 인근의 속셈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이 내 손을 꼭 잡고 초등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집에 아이요? 세상에, 요즘도 돈을 모르는 아이가 다 있네요.
아침에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사려고 줄 섰는데, 이 아이 차례가 되어 돈 달라니까 ‘돈 없어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에 돈 가지고 와서 사 먹으라 했지요.”
주변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마냥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혹시 우리 아이를 부족한 아이로 볼까봐, 애써 웃으며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첫돌 무렵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림책을 또박또박 읽던 우리 딸을 보고 간호사들이 ‘천재 났다’며 떠들썩했던 그 장면이.
그 영리하던 아이가, 줄만 서면 아이스크림을 주는 줄 알고 순진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줌마는 원칙을 지킨다며 냉정히 돌려보내다니, 나는 그 아줌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아이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마음이 아프다.
교사가 된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남에게 맡길 경제적 여유가 없어 결국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신혼집 해운대에서 친정 근처 영도로 이사했다.
친정 엄마는 이미 고혈압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오빠의 아이들까지 돌보느라 지쳐 있었다. 엄마는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 도로변 주택 앞에 작은 과자 구멍가게를 열었다.
손주들이 과자 사러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그 시절엔 배달업체들이 과자 상자를 직접 가져다주었기에 엄마는 진열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불량과자 공급이 더 많았다.
그마저도 엄마는 손주들 입에 들어갈 걸 먼저 살펴야 했다.
그 작은 가게 안에는 사랑과 인내, 그리고 삶의 지혜가 고요히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세상을 배우고, 나도 모르는 사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친정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푸념처럼 말씀하셨다.
“야가 또 과자를 다 먹어 치웠다. 하루 종일 입이 쉬질 않는다니까.”
나는 믿기지 않아 웃으며 반박했다.
“엄마, 이 조그마한 애가 어떻게 가게 과자를 다 먹어요?”
그러자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아이가 먹지도 않고 뜯기만 한 과자 봉지들을 모아 보여주셨다. 과연 꽤 많긴 했지만, 그걸 다 먹은 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그날그날의 과자 값을 꼼꼼히 계산해 드렸다.
빙과류만은 달랐다.
녹아버리면 남길 수 없으니까, 먹다 남은 흔적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빙과류를 다 먹고 난 나무 막대를 가져와야 다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도록 규칙을 세워두셨다.
우리 아이는 과자는 마음껏 고를 수 있었지만, 빙과류만은 나무 막대를 ‘교환권’ 삼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초등학교 앞 아이스크림 가게 아줌마에게 “돈이 없어요.”라고 말한 다음 날,
우리 아이는 버스를 타지 않고 먼 길을 걸으며 빙과류 막대를 잔뜩 주워 가방에 넣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그 가방을 뒤지기 전에, 그 막대를 어디에 쓰려는 건지 한마디만 물어보았더라면 .....
그날의 분노는 나를 향한 부끄러운 기억의 그림자였고, 그날의 아이는 그저 친정엄마의 규칙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미안하다.
그 어린 마음에 남긴 상처를 이제라도 어루만져 주고 싶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가 정말 미안해.
그때 물어보지 않고,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지금 너는 스물아홉 살, 이제는 엄마보다 훨씬 단단하고 현명한 여인이 되었겠지.
하지만 엄마 마음속에는 그날의 네 울음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