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파문을 알아 준 바다 7

마음의 파문을 알아준 바다 7

by 김효숙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뒤, 아버지는 상이용사가 되어 목발을 짚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 집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빛과 어둠의 순환은 여전히 반복되었다.


부산 영도 피난민촌, 봉래동의 여섯 평 남짓한 오두막집. 그곳에서 열 식구가 서로 부대끼며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그리고 우리 다섯 남매.

변소도 없고, 방 하나에 부엌을 겸한 구멍가게까지 딸린 그 좁은 집은 짜증과 분노가 들끓는, 작은 ‘폭발의 제작소’였다.


아침이면 온 집안이 벌집처럼 들썩였다.

양반 가문의 체면과 허세 따위는 이미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살기 위해, 그저 하루를 버티기 위해 어른들은 모두 일터로 내몰렸다.


할아버지는 연탄을 나르고, 집 앞 골목에서 풀빵을 구웠다.

할머니는 달비 장수로 긴 머리카락을 사러 온 동네를 누비며 다녔다.

그 머리카락은 미국의 가발 공장으로 수출되던, 당시의 귀한 생계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력공사 전차 보조 기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떡, 반찬, 국수, 참기름…

할 수 있는 모든 먹거리를 만들어 팔았다.


좁은 부엌. 가게와 방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몸이 부딪히고, 발뒤꿈치를 밟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이 얽히면 말이 얽히고, 말이 얽히면 싸움이 터졌다. 그 싸움은 곧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밤이라 해도 쉼은 없었다. 쪽잠 사이사이로 땀 냄새와 숨소리, 울음 섞인 한숨이 떠돌았다.

눈물이 마를 틈조차 없는 나날이었다. 낮에는 일하면서 다투고, 밤에는 서로의 체온 속에서 겨우 잠들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피 터지는 싸움이 끝나면, 가족은 잠시 흩어졌다.

나는 할머니와 삼촌과 함께, 고갈산 위 더 작은 오두막으로 옮겨 갔다.

고작 다섯 살이고 분리불안이 심했던 나를 그곳에 두기까지 어머니도 얼마나 고심했을까.


그날, 어머니는 애틋하고도 단호한 눈빛으로 내게 부탁했다.

“할머니가 없는, 삼촌만 있는 방에서는 절대로 자면 안 된다.

그리고 할머니가 귀신을 본다고 할 때는 던지는 칼을 조심해야 해.

약속 지키면, 엄마가 꼭 데리러 올게.”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지켰지만, 어머니는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족이 다시 한 지붕 아래 모일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밤이 오면 공기는 묘하게 얼어붙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실성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잠을 참았다.

할머니는 밤마다 기도하러 뒷산 바위에 올랐다.

엄마의 약속, 삼촌이 혼자 자는 방에서 자지 않기 위해 나도 바위 위로 따라 올라가 할머니 곁에 누웠다. 기도 소리와 휘파람, 바람 소리가 뒤섞여 정말로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칼끝보다 더 무서운 공포를 견디며 눈을 감았다.


너무 따뜻한 것이 그리워 기도하던 할머니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차갑게 내 손을 뿌리쳤다.

나는 바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이 바위가 엄마의 살이라면…”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가족이 흩어진 뒤, 어머니는 더 독하게,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떡장수, 반찬가게, 호떡, 참기름, 국수…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장사는 모두 손에 익혔다.


어머니의 손은 늘 불에 덴 듯 뜨거웠고, 머리에 이는 짐이 많아 두개골이 말랑거렸다.

그렇게 흘린 땀과 한숨이 쌓여 마침내 아래 동네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고생과 수고로 가난과 절망을 이긴 어머니의 승리였다.


내가 중학생 무렵, 우리 동네 최초로 무허가 2층 집을 지은 것도 어머니였다.

목수 한 사람만을 불러 날일을 맡기고, 미장과 대모까지 아버지와 함께 직접 했다.

온 가족이 신작로 바닥에서 자갈을 퍼 날랐다. 그 자갈로 콘크리트를 만들고, 그 콘크리트로 꿈을 쌓았다.


그러나 집이 조금만 올라가면, 불법 건축 단속으로 경찰, 기자, 동사무소 직원이 들이닥쳤다.

희망의 층을 쌓을수록, 세상은 그것을 부쉈다. 어머니는 부서지는 벽 앞에서 오열했다.

가난의 피가 묻은 돈을 단속반 옆구리에 찔러 넣기도 했다.

그렇게 몰래 밤 공사로 이어갔다. 결국 완성된 집은 누더기 같은 2층이었다.


방 한 칸, 손바닥만 한 옥상 마당. 그 마당에 서면 영도 조선공사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바다가 내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 늘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마치 내 마음의 파문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옥상에선 늘 국수를 말렸다.

비가 오면 방 안에 국수를 널었다. 우리 형제들은 말리는 국수 밑에서 공부하고 잠을 잤다.


비 오는 밤이면 습기로 축축해진 국수가 떨어지면 쥐가 갉았다.

이불 위로 기어오르는 쥐의 발톱 소리, 그것이 어린 나에겐 세상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길렀다. 그런데 고양이 녀석은 쥐를 잡아 와 이불 위에서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다.

국수 냄새와 죽음 앞에 찍찍대는 쥐의 비명, 그 사이가 우리의 어린 날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이른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는 엄마와 함께 반찬 장사를 도왔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그저 기적이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우리 집, 봉래동에서 영선동 교회까지 가려면 아이들의 걸음으론 제법 먼 길이었다.

산복도로를 따라 내려가, 영도초등학교 근처의 왜정 고관의 부잣집 골목을 지나야 했다.

나는 늘 일찍 집을 나섰다.

부잣집 대문 틈으로 들여다보며 잘 정리된 일본식 정원과 마루, 그곳에서 나는 꿈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집에서 살아야지.’ 그 바람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생존을 견디며 살게 한 희망의 끈이 되었다.


몇 년 전 캄보디아 여행을 갔을 때, 길 위에서 “원 달러!”를 외치며 팔찌를 팔던 대여섯 살 아이들을 보고 문득 내 어린 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내미는 팔찌를 모두 사주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그런 거 사주면 그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하게 돼요.”

그러나 나는 안다. 어른들이 반찬을 사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한 번의 친절이, 그 아이에게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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