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은혜
《통찰과 통합》
어머니는 죽기 살기로 장사와 가사일을 해내며 다섯 형제를 키워 내셨다. 지병이 깊어지신 뒤에도 내 자녀 셋을 품에 안아 길러 주셨다.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엄마는 링거와 산소 줄에 의지한 채 침대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날, 수액이 다 들어가 주사를 뺀 뒤 엄마는 산소줄마저 잠시 빼고 한결 가벼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셨다.
“엄마, 이참에 화장실 다녀오실래요? 덜 불편하실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난 용변은 보고 싶을 때 볼 거야.”
그 말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짧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투병과 혼수를 오가시다 끝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 나는 매일 같이 엄마의 일상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기억 속에 불현듯 떠오른 그 한마디—“보고 싶을 때 볼 거야”—가 나를 헛웃음 짓게 하다가, 어느 순간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었다.
엄마는 늘 말했다.
“넌 백일도 안 돼서 똥오줌을 가린 천재였지.”
믿기지 않아 물었더니, 그때 집은 밥조차 굶을 만큼 가난했단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임신하자마자 하늘의 복처럼 쌀장사 기회가 들어왔고, 배를 쓸어내리며 ‘이 아이는 먹을 복이 있구나’ 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가난을 벗어날 거라 믿었다고 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또 딸이라는 이유로 할머니의 구박이 시작되자, 엄마는 이를 악물고 장사에 매달렸다.
기저귀를 빨 여력조차 없던 엄마는 생후 3주 된 내게 용변 훈련을 시켰다. 아기의 용변 시간을 기록하며, 그 시각이 되면 내 가랑이를 벌려 안고 볼 때까지 버텼다. 아기는 울부짖었지만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울음을 삼키고 그 자세에 익숙해 배변 훈련에 적응되었다.
엄마는 그것을 자신의 성취라 여겼고, 동네방네 “우리 애는 천재야”라며 자랑했다.
그러나 내 욕구를 억눌러야 했던 그 강박 훈련은 결국 나를 병들게 했다. 소아신장염. 온몸이 붓고 숨이 차올랐다. 장사로 바쁜 엄마 대신, 할아버지가 나를 업고 독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병원—지금의 침례병원—을 3년간 다니셨다. 할아버지의 정성과 선교사 의사들의 손길로 나는 기적처럼 살아났다.
엄마는 용변 훈련과 병의 상관관계를 떠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던 할아버지를, 손녀에 대한 희생으로 모두 용서하고 시아버지로서 끝까지 존중했다.
가난을 극복한 엄마는 다섯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냈고, 내가 교사가 되어 가정을 꾸렸을 때 다시 내 아이 셋을 품에 안아 길러 주셨다. 그분의 헌신은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내 의식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삶의 전사’였다.
그러나 “보고 싶을 때 볼 거야”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되뇌며 나는 깨달았다.
그 말엔 평생 억눌러 온 통제와 자율, 억압과 자유의 그림자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결국 나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듯 외쳤다.
“엄마, 왜 말 못하는 아기였던 나를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었어요? 울어도 눕혀 주지 않고, 볼 때까지 버티게 한 그 엄격함이 너무 아팠어요!”
엉엉 울던 내 마음에, 마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잘 살고 싶어서 그랬단다. 모두 잘 살게 하고 싶어서, 네 도움이 필요했단다.
그때의 그 아기가 나를 도와줘서 고마웠단다. 그래서 네 새끼까지 내가 길러 주며 그 고마움을 갚고 싶었단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하늘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그 울음 속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은혜와 상처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찰은 통합이 되어가고, 분노는 사랑으로 녹아들었다.
그제야 양가감정의 폭을 줄여 진심으로 어머니 사랑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