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이해-슬픔-애도-희망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이런 산아제한 슬로건은 196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급기야 1990년대에는 ‘열 아들 부럽잖다, 하나 딸 잘 키우자’라며 한 자녀를 권장하는 구호까지 나왔다.
1989년, 나는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 두 딸을 둔 중학교 교사였다.
‘둘만 낳자’는 국가의 산아제한 정책이 엄격히 시행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오랜 관념을 거스르지 못하고 세번째 임신을 했다.
그 당시, 산부인과 대기실은 초음파와 양수검사로 태아의 성별을 알아보려는 임산부들로 붐볐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은 여전히 굳건했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 전체가 기형적인 성비 불균형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아가 딸로 판명되면 일부 어머니들은 인공중절 수술을 서슴지 않았다.
낙태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공공연한 일이었다.
무절제한 중절 시술로 인한 산모의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정부는 초음파나 양수검사를 통한 성별 판독을 강력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부 산부인과에서는 단속을 피해 고액의 진료비를 받고 비밀리에 성별을 알려주었다. 또 다른 경로로는, 조산원에서 전문의 자격이 없는 산파가 초음파로 성별을 감별하고,
결과가 딸이면 연계된 병원으로 연결해 인공중절을 받게 하는 우회적인 방식도 존재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하던 절박한 산모들과,
그 절박함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던 일부 의료진이 맞물려 있던 시절—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존엄이 모두 가벼워진, 어둡고 비극적인 시대였다.
나 역시 아들을 낳고 싶어 세번째 임신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후회와 함께, 무모한 선택에 대한 갈등과 애타는 불안이 자리했다. 출산 날이 다가올수록, 아들을 향한 간절함보다 생명을 품은 두려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동료 교사이자 친구인 00이는 딸 한 명을 낳고 그 딸이 돌도 되기 전에 남편이 예비군 훈련가서 산아제한 홍보 강사의 선전에 현혹되어 아내 동의도 없이 바로 정관수술을 받아 외동딸을 키우고 있었다.
“ 남편이 예비군 훈련 갔다가 산아제한 홍보 강사 말에 홀딱 넘어가서, 그 길로 정관수술을 받고 온 거 있지 뭐야. 우리 애, 돌도 안 됐을 때 말이야.”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뭐 너한테 동의도 없이?”
내가 놀라서 묻자, 그녀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 대판 싸웠지만… 결국 이렇게 무남독녀 외동딸 하나 키우며 살고 있잖아.”
그녀는 내 배를 한번 쓱 훑어보며 말했다.
“넌 셋째라니, 부럽다. 그게 아들이든 딸이든 말이야. 난 이제 다시는 가질 수도 없는데..
만약 딸이면, 나 좀 줘라. 진심이야. 나도 딸 하나 더 키우고 싶다.”
그 말에 서로 웃었지만, 마음이 저릿했다. 농담 속엔 그녀의 결핍이, 그리고 시대의 상처가 스며 있었다.
그 시절,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는 국가의 명령처럼 절대적이었고, 셋째를 가진 여자는 어딘가 숨죽여 다녀야 했다. 나도 두 자녀를 이미 낳은 터라, 셋째 임신은 떳떳하지 못했다. 그래서 산달이 다가올 때까지 정기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 둘을 챙기기에도 버거웠고, 세 번째 임신한 몸이 점점 무거워져 갔다.
‘세 번째는 금방 낳는다’는 말을 믿고, 출산 신호가 오자 부랴부랴 도시 변두리의 작은 병원으로 향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세 번째 출산이라 쉽게 생각했는지, 산파에게 분만을 맡기고 퇴근해 버렸다. 그러나 임신 내내 긴장과 불안 속에 지냈던 탓일까, 그날의 분만은 예기치 못한 난산이었다.
자궁수축이 빠르게 진행되어 오후 7시경, 나는 분만대로 옮겨졌다.
분만대 위에서의 시간은 멈춘 듯 흘러갔다.
아이는 후두후방위(Occiput Posterior)였다. 아기의 얼굴이 산모의 배 쪽을 향하고,
뒷머리(후두부)가 산모의 등 쪽을 향한 상태로 머리가 반대 방향을 하고 있었다.
산파는 자궁문이 완전히 열릴 때마다 손을 넣어 아기의 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녀의 손끝은 점점 거칠어지고, 숨소리에는 초조함이 섞여갔다.
“왜 힘을 안 줘요? 지금이에요, 지금!”
냉정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분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정신을 붙들려 애써 보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산파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힘을 안 주면 태아가 위험해요! 정신 차려요!”
그녀의 절박한 외침 속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도 아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밤은 깊어 갔고, 분만실 안의 공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
결국 산파는 다급히 간호사에게 외쳤다.
“SOS! 의사 불러요, 지금 당장!”
늦은 밤 병원 복도는 조용했지만, 분만실 안은 전쟁터 같았다.
0시가 가까워서야 의사가 달려왔다. 상황을 확인한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왕절개 준비에 최소 두 시간은 걸립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자연분만으로 가야 합니다.” 그 말은 곧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의사는 산파와 함께 다시 아이의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후두후방위입니다. 내회전 시도합니다. 태아 심박수 떨어집니다!”
기계음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결국 의사는 피 묻은 가운을 입은 채 분만실 문을 열고 밖에 있던 보호자를 불렀다.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합니다. 지금은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교회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지금… 기도 좀 해주세요. 우리 호숙이가…”
그러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분만실 안에서는 여전히 산소호흡기 소리와 함께 생명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복도 문 너머로 희미하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교회 봉고차가 도착해 교인들이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눈물로 기도했다.
어머니는 식은땀에 젖은 손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
어머니의 두 눈에는 오래된 공포가 어렸다. “하나님, 제발 이번엔 살려주이소…”
남편이 네 살 때, 시어머니는 동생을 낳다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동생도 함께 갔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의 일처럼 들렸는데, 그날 밤, 그 비극이 내게로 다가와 있는 듯했다.
의사와 산파의 손끝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의식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산소호흡기로 호흡하며 소리가 희미하게 들어오는 듯, 세상이 점점 멀어졌다.
그때 문득, 두 딸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 순간,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러다 내가 죽으면, 저 애들은 어떡하지?’ 차가운 공포가 가슴을 죄었다.
살아야 한다.
둘 다 목숨을 잃을 수 없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배 속의 아이보다, 이미 세상에 남아 나를 기다릴 두 딸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저는 살아야 합니다. 두 딸만이라도 지키게 해 주세요.
저는… 살아야 합니다.” 눈물로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웠다.
죽음이 코앞에 닿았지만 나는 어머니이고, 생존자였다.
0시 20분경, 뒤늦게 도착한 남편의 목소리가 분만실 문 쪽에서 들려왔다.
“나왔다! 힘내라!”
그 한마디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아닌 울분이 치밀었다.
몸속의 마지막 힘이 남아 있었다면, 그건 분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발악처럼 온몸을 던져 힘을 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의사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아이구, 아들입니다!”
그 말이 귓가를 스치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는 안도와 후회, 두려움과 감사가 한데 얽혀 있었다.
산후 처치를 마치고 분만실을 나왔을 때는 새벽 한 시가 넘었다.
병원 복도에는 교회 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 늦은 시간까지 나의 고통을 함께하며 찬송하고 기도해 주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날 무렵, 나는 살아 있었다.
기적처럼 살아난 생명과 산모를 환호해 주며, 축복이 쏟아졌다.
감사의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다인실로 옮겨지자 내 곁에 남편이 와 앉았다.
그는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소원 풀었는데, 왜 울어?”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손길이 그때는 이상하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을 겨우 넘어서 일까, 몸은 살아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현실을 따라오지 못했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 그 밤 내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옆 병동 쪽에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울음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규가 섞여 있었다.
간호사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들려온 속삭임—
“옆 병동 침상에 있던 처녀가… 갔답니다.”
나는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소리만 들었다.
그 애끊는 곡성은 벽을 넘어 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조금 전까지 숨 쉬는 기적을 경험한 나와는 달리, 누군가는 그 새벽, 마지막 숨을 놓았다.
살아남은 기쁨과 죽음을 맞은 이의 슬픔이 한 병원 복도 안에서 교차하던 새벽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다인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호사에게 이인실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운 좋게 빈자리가 생겼다는 말에 급히 이인실로 옮겨졌다.
앞선 환자의 물건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도 않은 방이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그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자, 맞은편 침대의 환자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 자리에서 처녀가 죽었잖아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급히 치우느라 남겨진 그 처녀의 물건들이 방 한켠에 놓여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렸다.
이리 누우면 그 처녀의 머리가 여기였을까,
거꾸로 누우면 이 자리가 그 발치였을까.
도저히 병상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간호사를 불러 말했다.
“여기서는 못 있겠어요. 제발 다른 방으로 옮겨 주세요.”
하지만 비어있는 입원실이 없다는 답으로 돌아왔다.
잠시 망설이던 간호사가 말했다.
“여름이니 복도에 임시 침대를 놓아 드릴 수 있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박 3일의 입원 중, 1박 2일을 복도에서 보냈다.
퇴원 전 마지막 밤, 나는 병실 복도에서 숨을 고르며 죽음의 그림자를 스치고 돌아온 몸으로
조용히 새 생명의 온기를 느꼈다.
나는 세 아이 모두를 자연분만으로 낳았다.
그런데 1990년, 셋째를 낳을 때 지불한 병원비는 제왕절개로 수술하고 일주일간 입원한 산모들의 비용보다 더 많았다. 당시 산아제한 정책으로 셋째 출산은 의료 보험 혜택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낳은 아들은 정책의 벽과 시대의 시선을 넘어 얻은, 비싸고도 귀한 생명이었다.
셋째는 출산 휴가조차 눈치가 보였다.
나는 여름방학 기간 중인 8월 23일에 출산했다. 하지만 그때는 방학이라도 산휴 일수를 포함해 60일로 계산되었기에, 정해진 60일의 출산 휴가는 방학이 포함되어 줄어들었다.
아이를 낳고 한 달 보름쯤 지나자 다시 교단에 섰다.
몸이 덜 회복되어도 학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이의 낮 육아로 고생이 많으셨던 친정엄마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셨다.
병이 점점 깊어 가는데도 “네 가정이 빨리 자리를 잡아야지.” 하며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세 아이의 낮 육아를 전적으로 맡아 주셨다.
엄마가 신생아를 돌보는 동안,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생이던 두 딸은 내 퇴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속셈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을 오가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어린 두 딸과 병든 어머니, 그리고 갓난아이가 하나의 작은 생태계를 이루듯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었다.
퇴근 후 저녁 무렵, 지칠 대로 지친 두 여인은 육아 임무를 교대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씩씩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도 하루의 에너지가 소진된 즈음이지만 종종걸음으로 친정으로 달려갔다.
마치 릴레이 바통을 넘겨받듯, 엄마 품에 있던 세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기를 등에 업고, 두 딸의 손을 잡고, 걸어서 집에 오면 그때부터는 독박육아와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다는 건 버틸 힘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그 버팀의 끝에는 늘 피로가 있었다.
피로는 어느새 짜증으로 변해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저 버겁게 들리던 날들이 있었다.
금융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일이 많다”는 말만 남기고
잠시 눈 붙였다가 새벽에 나가는 하숙생 같았다.
그 시절, 가정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오롯이 나와 친정엄마의 어깨 위에 걸려 있었다.
학교 근무, 육아, 가사노동, 그리고 하숙까지-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버거워졌다. 점점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한숨은 깊어 갔다.
맞벌이 수입의 일부로 가사도우미 손을 빌려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싶었다.
“엄마, 도우미를 일주일에 하루라도 써보면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꺼냈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불같이 화를 내며 ”너 잘살라고 내가 이 고생한다! 잘살라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슨 도우미 타령이야, 그 돈 있으면 나한테 줘!!”
그 말에 숨이 막혔다.
어머니의 외침은 “웰빙”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나 먼, 오직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혹독한 가난의 세월이 한이 되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딸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닌테...”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삶의 가장 큰 짐을 함께 들어주시는 가장 고마운 분이시다.
그 뜻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고생을 빛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그래도 학교 일과에 지치다 보면, 가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더 받고 싶었다.
그럴 때면 몸이 아픈 친정엄마께 “건강을 좀 챙기셔야죠.” 하며
걱정인 듯한 말로 핀잔을 주고, 결국은 짜증을 내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싫었고, 화가 났지만 정작 화를 낼 대상도 없었다.
피로와 분노, 미안함이 뒤섞인 나날이었다.
어느 날부터 자녀들 이름을 부르며 “밥 먹어라”고 일상적인 말을 하는데 딸들이 “엄마는 왜 화를 내는데” 라며 내가 의식하지 못한 불편한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에 짜증과 화가 묻어 있었다.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가 안 되는 그냥 ‘성난 엄마’였다.
셋째가 아기라 대중목욕탕도 친정엄마와 격주로 번갈아 다니다 셋째가 돌이 지나 세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친정엄마와 공중목욕탕에 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목욕 와서도 친정어머니와 나는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친정어머니는 딸인 내 등을 밀어주고 따뜻한 물을 여러 번 끼얹어주셨다.
그때 친정어머니가 내 허벅지를 자세히 보면서 “야~ 희한하다, 데인 흉터가 희미해져서 모르겠네. 이제 누가 봐도 모르겠다.
내 다리에는 기억나지 않는 데인 흉터가 있다. 발등에도 있다.
처음으로 “엄마, 이거 언제 데였어요?” 물었다.
“ 니가 내 젖 빨고 있는데 데였다... ”
“뭐요, 젖 먹고 있는데 어떻게?”
“말도 마라, 너그 아부지가 밥상 앞에서 니 젖먹이는데 펄펄 끓는 국을 내 한테 던진다고 던졌는데 젖먹는 니 다리에 쏟아져서 데였다 아이가, 아이고, 아가야 살이 얼마나 연하던지, 옷을 벗기는데 살이 홀라당 다 벗겨졌다.
병원에서 입원 시켜야 한다고 해서 입원을 시키려 했는데 내 품에서 절대로 안 떨어지려고 얼마나 악을 쓰며 울던지, 가슴이 미어져서 그냥 내가 치료하겠다하고 무작정 데리고 왔다. 진짜 화상이 무섭더라. 아~ 그 때 니하고 내하고 얼마나 많이 고생한 거 말도 못 한다”
친정어머니는 내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가는 세월이 흉터도 희미하게 해 주네” 당신의 애환을 풀 듯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아직도 친정엄마와 나는 엉겨 붙어 지금도 여전히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 실제가 한스럽고 헛헛하다.
말문이 막혀 한참 있다가 “너무했다. 아버지”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멍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세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삶이 전쟁터라고 생각하고 전투적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어처구니없는 흉터의 이유를 대중목욕탕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지금 사는 것도 힘이 드는데 갓난아이 때 상처를 낸 친정아버지를 구체적으로 원망하는 무거운 감정이 더 해졌다.
‘살아 있는 호랑이’ 또 어떤 상처를 입힐지 모르는 아버지와 언제, 어떻게 따지고 싸워야 하지?’ 상처 난 이유를 알고 난 이후부터 나를 괴롭히는 숙제가 생겼다.
데인 상처는 친정어머니의 정성 어린 치료로 흉터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다리에 외상은 이상 없이 나았는데 걸음마를 하지 않았다. 앉은뱅이가 되는 줄 알고 어머니에게 또 다른 걱정이 주어졌다. 외상 후 스트레스 (PTSD) 증상이 신체화로 나타난 상태였다. 걷지도 못하는데 소아 신장염까지 발병했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해야 했고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두 번 다시 손자녀를 잃지 않겠다는 일념이, 등잔불 아래에서 숨이 꺼져가던 손녀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왜소한 몸으로 나를 업고 1960년대 초량에 있던 서독병원(독일 의료선교사)을 3년을 드나드셨다. 그 병원은 훗날 의료 원조가 끝나고 침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할아버지는 남자의 체면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오로지 손녀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 눈빛에는 오래된 상처가 숨어 있었다. 전쟁 중 아버지가 부재하던 시절, 둘째 오빠가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의 등에 업혀 돌아온 죽은 아이를 할아버지 적삼에 싸서 직접 묻으셨다.
그날 흘린 피눈물의 기억이 당신의 평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내 눈앞에서 다시는 손자녀를 잃지 않겠다.”
그 결의가 불씨처럼 남아, 꺼져가던 내 생명을 되살린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정성과 할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나는 걷게 되었고, 소아신장염의 무서운 질병도 이기고 살아났다. 걸음마가 너무 늦어서인지 걸음이 늘 어설퍼 잘 넘어졌따. 할아버지는 비오는 날은 나를 업고 학교 교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초등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당신만큼 큰 덩치의 나를 아프다면 무조건 업어 주셨다.
상처받음과 나음은 서로의 그림자였다.
그 둘의 경계를 헤매며 나는 관계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사람을 알고 싶다는 갈증이 내 안에서 서서히 불처럼 타올랐다.
1996년 어느 날, P대학교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열린 ‘대상관계’ 심리상담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날이 나의 심리상담 공부의 첫걸음이었다.
강의 중 강사의 한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박혔다.
“현재의 인간관계는 과거의 관계에서 비롯 됩니다.
신생아는 어머니를 포함한 타인과 심리적으로 융합된 상태에서 생을 시작하지요.
생애 초기에 아동과 대상은 아직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아하, 그렇구나.’
나는 아직도 어머니와의 경계가 분리되지 않은 채, 신생아의 기질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내 안의 오래된 엉킴의 실체를 마주한 것이다.
1996년 대학원에 진학해 심리상담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가시지 않아 불편하게 대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고 싶어 상처 낸 아버지 앞에 마주 앉았다.
벼르고 벼른 묵은 말을 꺼내려는데 울화가 올라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상처 앞에 마주 섰다.
“아버지~” 뜨거운 눈물이 났다.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치며 “엄마가 내 젖 먹이는데, 왜, 국그릇을 던졌어요?”
아버지는, 감정에 북받친 딸을 그윽한 눈으로 지켜보며 입맛을 다시 듯 어물거리시다 아주 간단하게 “너희 엄마 성질 알 잖냐” 한마디 하셨다.
“너희 엄마 성질 알잖냐.”
그 한마디가 귀에 박히는 순간, 오래된 장면들이 재생되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분노가 맞부딪치던 장면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가난에 짓눌린 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던 엄마는 갈등이 터질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 맞은편에는 6·25 상이용사로 다리가 불편하고, 전쟁 후유증과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있었다.
두 분이 살아온 삶이 이해되었다. 내 안에서 오랫동안 아버지를 향해 드리워져 있던 원망의 휘장이 바람에 휙 날아가듯 사라졌다.
원망은 사라지고 슬픔만 남았다. 그러나 그 슬픔조차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애도의 시간은 곧 회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웃으며 살고 싶다. 상처 너머의 삶을 향해 나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