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후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창가에 서 강아지 털을 말렸다. 무심히 내려다본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는 엄마와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 하원 시간, 엄마들이 가방 한 개씩을 팔에 걸고 아이들과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그네를 밀어주기도 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잠깐 있었던 것 같다.
내 아이는 생일이 늦고 걸음마가 늦어 네 살이 되던 해 어린이집에 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드디어 24시간의 육아에서 해방되는 기회. 그러나 친정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울산과 부산을 오갔고 틈틈이 부모교육 강의를 다니며 바쁘게 생활했다. 그러다 센터에서 들었던 교육정보에 빠져 학습지 교사도 했다. 그렇게 아이는 입소한 지 4개월 만에 집에 오면 엄마가 아닌 돌봄 선생님의 케어를 받았다.
그러던 날, 저녁 수업을 끝내고 몇 분이라도 아이를 빨리 보기 위한 마음으로 그날도 한달음 달려갔다. 그런데 나를 본 아이가 내뱉은 말은 충격이었다.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가! 형아, 누나들 공부 가르쳐 주러 가!”
다섯 살 된 아이가 누워서 TV를 보며 안아주려는 내 손을 뿌리치고 발을 동동거렸다. 언제부터인가 TV와 유튜브를 시청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리모컨을 익숙하게 작동하는 아이를 떠올리며 나는 하던 일을 접었다.
‘내 자식 잘 키우려고 일하는 건데 남의 자식 공부시킨다며 정작 내 자식은 내팽개치고 있다니. 그래, 한 명씩 방문해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에 여러 명 가르치는 게 낫지!’
이후 나는 일하는 시간을 줄여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이직했다. 원장님은 담임의 보조 업무보다는 특활 수업과 전체적인 관리 업무를 주었다. 다행히 내가 하고 싶은 수업도 하고 인정도 받으며 보람을 느꼈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의 일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양육이 주 업무가 돼버린다. 물론 요즘은 남편도 집안일이나 육아를 분담하기도 하지만 내 주변엔 주로 혼자 하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나 또한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독박육아를 하며 모든 걸 해치워야 했다. 사실 결혼 전 ‘한국의 아줌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줌마들이 왜 억척스럽게 변하는지 나는 결혼하고 알았다. 그건 여자의 선택이 아닌 운명과도 같은 거였다.
한편, 아이들이 넘어질까 봐 뒤에서 등을 받치며 그네를 태우고 여기저기 뛰는 아이들을 뒤쫓으며 같이 뛰는 엄마들을 내려다보니 과연 그녀들은 자신의 일을 접고 아이를 키우는 시간들이 어떤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가끔 남자들은 큰소리치기도 한다. “군대 안 간 사람은 모른다!‘라고. 하지만 여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것도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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