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가꾸기
곤지암 정원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전세살이다 보니 내 맘대로 나무를 베어내거나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잔가지를 솎아내는 선에서 관리를 해 주었다. 용인에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나서 정원을 천천히 살펴보니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정원 조성 초기에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이 나무 저 마무 심었던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무와 같이 답답함도 같이 커져 있었다. 채움의 시간이 지나면 비움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다. 정원 조성 초기에는 빈 공간을 허기진 배를 채우 듯 각종 내무들로 채워 넣는다. 세월이 흐르면 나무들이 자라서 공간을 메우고 여유가 사라진다. 서로 공간을 점유하려 다투면서 모양새도 흉해진다.
정원 비우기
용인 집을 샀을 때는 건축 후 1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정원을 살펴보니 소나무 다섯 그루, 편백나무 여덟 그루, 잣나무 다섯 그루, 주목 세 그루, 단풍나무 두 그루, 벚나무 네 그루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나무 다섯 그루가 더 있었다.
잣나무는 정원수들 중에 가장 높이 자라 있었다. 햇빛을 차단하여 그 아래에 있던 편백나무들의 생육이 부진했다. 또한 옆에 있는 소나무와 공간을 차지하려 다투고 있었다. 과감하게 다섯 그루 모두를 베어냈다. 정원이 시원해졌다.
소나무 세 그루는 각각 개성이 있어서 달리 접근했다. 반송 한 그루는 마당 왼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입주 초기에 이 나무는 첫 번째 나온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 가지들로 인하여 균형 잡힌 피라미드의 형태의 수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지가 마당 아래로 쳐져 그늘을 만들었고, 그 아래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마당을 정리하는데도 방해가 되었고 화단으로 이동하는 경로도 우회하도록 만들었다. 마을 관리실에서는 일 년에 세 번 잔디를 깎아 준다. 작업자들이 왔을 때 이 분들이 조경 일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나무의 전지 방법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아래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자란 가지들은 잘라내고 그 위 가지들만 키우자는 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수형이 왜소 해져서 보기 싫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더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분들의 의견을 따라서 전지를 했고 실제로 해를 거듭할수록 위쪽이 풍성하게 자라서 가지치기 전의 수형보다 더 수려해졌다. 이후에는 잔 가지들만 쳐주면서 가꾸어 주었다.
옆으로 약간 누워서 자라는 소나무는 높이 자라지 못하도록 관리해 나갔다. 사다리를 놓고 손이 닿지 않는 가지가 없도록 잘라주었다. 높이 자라면 관리가 어려워진다. 가지치기는 다른 집에서 전지 하는 정원사들을 관찰해서 배웠다. 한 가지에 새로 난 여러 가지 중 두 개 정도만 남기고 모두 잘라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수형을 보면서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냈다.
반송과 정원 반대편에 심어진 소나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숙고했다. 소나무 아래에는 그늘이 들어 잔디 대신 이끼가 바닥을 점령하고 있었다. 수형이 좋아서 베어 내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식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일 년을 고민한 끝에 베어 내기로 결정했다.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다음 해 그 나무 밑에 잔디가 자라는 것을 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 가장자리 옆 집과의 경계에 심어진 벚나무 네 그루는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오후부터는 해를 가렸다. 타인의 시선을 가려 주는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잘라 낼 수는 없었다. 대신 수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햇빛이 정원에 잘 들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가지를 쳐 주었다.
집 오른쪽 바로 옆에 심어져서 데크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단풍나무도 베어 내기로 했다. 일단 나무 중간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가지도 잘라주었다. 죽고 나면 다음 해 밑동을 잘라낼 계획이었다. 이번에는 단풍나무가 내 의지를 꺾었다. 이듬해 봄에 이 나무는 중간 잘라낸 부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가지를 키워냈다. 여름에 보니 머리를 산발한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다른 집 단풍나무들을 살펴보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 위로 자라는 가지들을 쳐내고 밑으로 자라는 가지들만 키우기로 했다. 내 살생부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나무가 되었다.
비움을 거부한 버드나무
아니다. 더 강인한 생존력을 보여준 나무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도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삶을 쟁취한 독종이다.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무단으로 정원에 침입하여 '나 또한 정원수'임을 주장하고 있는 종이 었다. 옆집과의 경계를 이루는 언덕에 자라나고 있던 버드나무가 일곱 그루였다. 그중 두 그루는 5미터 정도 자라서 시급히 처리해야만 했다. 맷집이 좋은 상대임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첫해 가을에 일곱 그루 모두 톱으로 베어 냈다. 무성했던 주변이 정리되어 깔끔해졌다. 진정한 문제는 다음 해 봄에 새싹과 같이 돋아 났다. 베어낸 자리에 새순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때때로 잘라 주었으나 며칠 지나면 다른 곳에서 싹이 났다. 이런, 요즘 애들 말로 '개'끈질겼다. 보통 나무는 베어내면 죽지만 버드나무는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가을에 다시 톱질을 하고 땅 위에 나 있는 그루터기를 가스 토치로 태웠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땅속에서 싹이 다시 돋아 나왔다. 버드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했다. 삼 년간의 투쟁 끝에 버드나무 한 그루부터는 항복을 받아냈다. 나머지 여섯 그루는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다. 포기하고 가을에 한 번 정도 잘라 주기로 정전 협정을 체결해 버렸다.
정원수들은 가지치기를 일 년만 건너뛰어도 표시가 바로 난다. 경쟁이 심하지 않고 주인이 돌보아 주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생육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머리 깍듯이 봄과 가을에 전지가위를 정기적으로 들어야만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정원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나무를 베어 내야 할지 고민해야만 하는 장소다. 집에 있는 쓸모없는 가구나 도구들을 버리고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는 미니멀리즘과 맥이 같다. 말끔하게 정돈되고 여백이 숨 쉬는 정원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쉼의 가치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 심리적으로 짓눌리고 시각적으로 피로감을 느낄 때 비움으로써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정원은 세월이 쌓이는 만큼 비움이 필요한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