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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May 08. 2024

백련암 가는 길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채지홍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상목마을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루봉이라는 산에 이른다.


이 산의 동쪽에 버려진 밭을 따라 5부 능선까지 올라가면 높이 6~7m, 길이 약 60m의 성벽과 같이 높고 긴 석축이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그 석축은 옛 시절의 영광을 자랑하듯 높고 정교하게 깎아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석축 위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백련암(길상사) 폐사지다.


폐사지에는 고향 마을의 전설과 함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폐사지로 변한 사연이나 전설을 전해 들은 것은 별로 없고 이곳저곳에 조각으로 기록된 절 이름과 간단한 사연만 전해져 올 뿐이다.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목의 아람 드리 나무가 안내하는 아름다운 산사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고 현실의 고달픈 삶을 해결하러 가는 땀방울로 가득한 길이다.


백련암 폐사지에 올라서면 옛 시절의 영광은 사라지고 저 멀리 문안산과 봉화산 그리고 고향의 길상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폐사지 뒤로는 길상산이 계절의 바람을 막아주고 앞은 산자락이 무변광대하게 펼쳐졌다.


연곡리에 들어선 보탑사 주지 스님은 원래 이곳에 보탑사를 세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토지가 종종 땅이라 매입도 어렵고 교통 여건이 좋지 않아 포기하고 연곡리 비립 마을에 보탑사를 세웠다.


아버지가 생전에 보탑사를 설립한 주지 스님을 멱수 마을에서 몇 번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멱수 마을이 개발하기 어려운 것은 근 팔십여 만평 중 구 할 이상이 청주 이 씨 종종 토지이기 때문이다.


상산지에 의하면 백련암은 진천의 서쪽 20리 지점에 자리했고, 비록 10여 칸에 불과한 작은 암자이지만 ‘삼한고찰’ 또는 ‘나대고찰’이라 하여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소개해 놓았다.


폐사지는 경작지로 이용해서 뚜렷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곳곳에 건물지의 단으로 보이는 석축들이 보이는데, 이들 석단들은 절터 전체로 보아 크게 2~3층으로 나누어졌고 드문드문 끊어져 마치 돌무지처럼 보인다.


석단 주위에 주춧돌로 보이는 석재가 흩어져 있고, 이들 중 한쪽 측면에 ‘한산주’라고 새긴 석재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되고, 절터 아래 밭부터 절터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기와조각이 채집되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금당터로 추정되는 주변에서 나한상으로 보이는 소조불상의 파편과 ‘가청’이 조각된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 그리고 상념에 잠기고 싶은 사람에게 폐사지를 찾아갈 것을 권한다지만 나는 고향의 백련암(길상사) 폐사지를 찾아가고 싶지 않아도 자주 찾아갔다.


마음이 울적해서 찾아간 것이 아니라 폐사지를 밭으로 일구고 생계를 위해 심은 담뱃잎을 따러 찾아갔다. 멱수 마을에서 폐사지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마을에서 대감 산소를 바라보며 느티나무가 선 언덕까지 힘겹게 올라가서 대감 산소를 우측 옆구리에 끼고돌면 절 안의 넓은 뜰이 펼쳐지면서 백련암 폐사지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비산비야인 오솔길을 따라 비지땀을 흘리며 폐사지를 바라보고 올라가면 고목의 고욤나무를 지나 오솔길의 끝자락이 나오고 그곳은 아버지가 일구던 절안 밭의 시작점이다.


그 밭의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련암을 떠받친 석조벽이 나오고 그늘을 드리운 감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그곳에서 한 번은 쉬었다가 올라가야 한다.


폐사지에는 예나 지금이나 깨진 기와나 절구 등이 밭 가장자리나 밭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오늘도 폐사지에는 무심히 스쳐가는 바람만이 어디선가 불어오고 불어 간다.


내가 백련암 폐사지로 종종 올라갔던 것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내게 농사를 짓는 가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내게 조상에 대한 깊은 사연을 남기지 않은 뜻을 잘 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농사로 얼룩진 자신의 길을 후손이 따라가지 말라는 뜻에서 일 것이다.


백련암 폐사지 주변에는 멱수 마을에서 가장 넓은 밭이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멱수 마을에 사는 사람은 절 안의 밭을 이용하지 않은 사림이 없다. 마을에 들어오면 누구나 절 안의  밭을 이용해서 먹고 살아가야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채지홍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지금도 멱수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운데 조선시대에 멱수를 방문해서 백련암(길상사)에 대한 기록과 칠언절구의 시조까지 남겼으니 궁금증만 더해간다.


백련암 폐사지에 대한 기록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온갖 농사일과 나무를 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게 폐사지는 그저 절이 사라진 자취와 흔적일 뿐이고 농사를 짓는 터전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폐사지 바로 아래 천여 평에 이르는 밭에는 아버지가 매년 담배를 심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절 안에 올라와 담배를 심고 순을 따고 제초제를 뿌리고 담뱃잎을 따서 경운기에 싣고 고향 마을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절 안의 오솔길 끝자락에서 경운기에 실린 것은 담뱃잎뿐만 아니라 폐사지터 위에서 죽어간 고목의 나무들이다. 폐사지 위에는 죽어서 고목이 된 나무가 많아 땔나무 확보가 용이했다.


폐사지에서 나무를 지게에 지고 마을까지 내려가는 것은 힘들지만 경운기를 오솔길 끝자락에 세워두고 마른나무를 경운기에 싣고 가는 것은 덜 힘들었다.


절 안의 폐사지는 마을 사람에게 절에 대한 내력이나 사연보다 배고픈 입에 풀칠하는 수단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누구처럼 마음이 울적해서 보러 가는 그런 폐사지가 아니었다.


멱수 마을 이름은 백련암 이전에 자리했던 길상사와 연관된다. 길상사나 백련암이나 같은 곳에 자리했던 절 이름이다. 단지 백련암은 근대 시대에 등장했고 이전에는 길상사란 절집 이름이 오래도록 명백을 이어왔다.


청주 이 씨 족보나 마을 이름 유래나 상산지에는 멱수 마을이 길상면에 자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멱수 마을 유래와 뜻은 차치하더라도 백련암 가는 길은 분명 생사 고락을 나누는 수행의 길임에 틀림없다.


산사의 스님은 불법을 공부하러 수행을 떠난다지만 농부는 가을의 수확을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고단한 땀방울을 흘리며 백련암 폐사지로 올라가야 한다.


고향 마을에 들어서면 백련암 폐사지는 바라보이지 않지만 대감 산소를 돌아 시루봉을 바라보는 길에 들어서면 백련암이 자리했던 웅장한 석조벽과 폐사지가 시야로 들어온다.


지금은 몇 해 전 산사태로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작은 오솔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솔길이 사라지면서 폐사지를 일구고 땀방울을 흘리며 농사를 짓던 마을의 농부들도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


이제 백련암은 누구도 찾아갈 수도 찾아갈 일도 없는 황량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런 폐사지를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산나물을 뜯어 생계를 유지하는 나그네와 텃새와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구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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