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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의 변주곡

by 이상역

그동안 협회에 근무하다 계약기간이 끝나서 집에서 쉬는 중이다. 집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취업할 곳을 구하지 못해 백수로 놀고 있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요즈음 가는 세월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날짜와 요일을 또렷하게 알고 지냈는데 집에서 쉬게 되자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알지 못하고 지나가는 날들의 연속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 기억력쇠퇴했다지만 알바를 다니는 아내가 주중에 하루라도 쉬면 날짜와 요일에 대한 혼선이 일어난다. 그에 따라 누군가와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직장에 다닐 때와 다니지 않을 때의 간극은 날짜와 요일을 제대로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의 차이 같다. 직장에선 업무와 누군가와 약속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 날짜와 요일에 신경을 쓰고 생활했다.


그런데 직장에서 물러나자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날짜와 요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자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처럼 인식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나마 유일하게 챙기는 것은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결혼이나 돌아가셨다는 사를 챙기는 일인데 그것도 달력에 표시를 해 놓아야 간신히 챙긴다.


하루의 일정이 촘촘하고 빡빡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고 느긋한 일상이 되다 보니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에 대한 관심과 신경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흥미와 관심도가 점점 떨어져 간다. 어머니는 구순이 넘기 전까지 팔 남매의 생일을 잊지 않고 생일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 아침 잘 먹었는지 등을 묻곤 하셨다.


나는 두 딸을 키웠지만 딸들의 생일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 아침을 잘 챙겨 먹었는지 등에 대하여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두 딸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놓지 않으면 생일날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종종 있다.


비록 어머니보다 나이는 적지만 어머니의 기억만도 못한 기억으로 살아간다. 이 글을 쓰면서도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기억해 내지를 못한다.


사람의 기억력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날짜와 요일에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이 인지상정일까. 젊은 시절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나이가 들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사뭇 다르기만 하다.


젊은 시절에는 오늘과 내일을 구분 짓고 행동하고 관리했는데 나이가 들으니 오늘과 내일을 구분 짓지 못하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처럼 여겨진다. 더불어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어렵고 시간을 매듭짓지 못하니 내 앞에 다가오는 것과 흘러가는 것 모두가 비슷비슷하게만 바라보인다.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고 날짜와 요일을 구분 짓고자 해도 구분되지 않고 과거와 오늘과 내일이 한 묶음이 되어 다가온다.


사회생활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도 부족한데 왜 기억력이 느슨해지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늘 날짜와 요일을 머릿속에서 기억하려 해도 도통 날짜와 요일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증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날짜와 요일에 대한 감각이 무딘 것을 넘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간다.


그에 따라 날짜와 요일을 개념 하지 않고 그저 그런 날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매듭짓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기사 내게는 급한 것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전화를 할 곳도 전화가 걸려 올 곳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무슨 뾰족한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텐데. 마땅하게 생각나는 것도 없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서 해결해야 할 일도 아니라서 세월의 흐름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낸다.


내 앞에 다가오는 날짜와 요일이 흐르는 강물을 타고 한꺼번에 떠내려와서 마구 뒤섞여 흘러가는 것 같다. 그런 세월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생기면 하루가 지났구나 하고 읊조리고 만다.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세월이 흘러간다고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가오는 세월을 아니 만날 수도 없으니 그날그날 마음의 애간장만 태우며 살아가는 신세다.


이제는 강물 위를 떠가는 부평초 같은 세월을 바라만 보지 말고 보다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내야겠다. 그래야 남은 인생을 보다 마디고 알차게 보내며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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