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점점 무르익어가는 계절이다. 비록 날씨가 간간이 변덕을 부리며 가는 봄날을 방해한다지만 여물어 가는 봄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구봉산을 걸어 올라갈 때면 사람들이 많아 호젓한 기분이 들지 않는데 구봉산 등산을 마치고 한적한 도로를 건너 승상산의 능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람들이 없어 호젓하게 다가온다.
승상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서 좋다. 산 초입부터 능선 길이 끝날 때까지 만나는 것이라곤 숲에서 자라는 나무와 고라니와 지저귀는 새들뿐이다.
길동에서 올라가는 산 초입에서 정상을 지나갈 때까지 능선 길 남쪽으로 굵은 고목이 쓰러져서 썩어간다. 몇 년 전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것들인데 산 나무와 죽은 나무가 얽히고설켜 바라보기에 그다지 좋지는 않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살펴보니 참나무와 아카시아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굵고 미끈한 나무들이 쓰러져서 썩어가는데 태풍이 반세기 동안 키워 낸 나무에 담긴 세월을 한 순간에 쓰러트렸다는 생각이 든다.
승상산 초입의 능선 길을 따라 올라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가 마치 유렵의 웅장한 성처럼 바라보인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빌딩숲이 도시의 마천루를 이루며 저 멀리까지 눈에 들어온다.
산 초입 능선 길 중간쯤에서 호흡 한번 가다듬고 올라가면 첫 번째 봉우리가 나온다. 첫 번째 봉우리까지는 가파른 언덕이라 거친 들숨과 날숨을 토해내다 보면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렇게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가 호흡 한번 내쉬면 두 번째 봉우리까지는 평지의 능선 길이 펼쳐진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 머릿속에 잠긴 생각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발걸음도 더뎌진다.
지금까지 천변을 걷던 능선 길을 걷던 홀로 걸어 다녔다. 남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 서로 말을 건네야 하고 그러다 보면 깊은 사색에 빠져들 수가 없다.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면 고독을 즐길 수도 없고 깊은 사색에 빠질 수도 없어 되도록 홀로 걷는 편이다. 능선 길을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숲에서 뛰어나와 능선 길을 가로질러 뛰어간다.
사월의 초록이 물들어가는 숲에 들어서면 내가 숲에 이끌려가는 것인지 숲이 나를 인도해 가는 것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능선 길을 홀로 걷다 보면 계곡에서 들려오는 차 지나가는 소리와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의 흐름에 맞추어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나 자신이 숲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봄날에 능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싱그러운 기운과 함께 마음도 상쾌해진다. 연두에서 뿜어져 나오는 숲의 정령과 나날이 촘촘한 그물망을 형성해 가는 숲을 바라보면 숲이 나를 생각의 늪으로 유혹하는 것 같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요한 숲길을 걷노라면 왠지 나도 모르는 심연에 다다른다.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나는 어떤 것에 이끌려 능선 길을 걷게 되었을까 하는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능선 길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왜 저렇게 올곧게 자라지 못하고 지금까지 굴곡진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지난 삶에 대한 반성과 후회도 하고 미력하나마 소소한 깨달음도 얻는다.
지금의 내 마음을 이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나를 산너머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것은 무엇일까. 숲길을 거닐며 생각하다 보면 한없는 생각의 우물로 빠져들게 된다.
승상산의 능선 길은 내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해 주는 숲길이 되어간다. 아침에 능선 길을 한 바퀴를 돌고 내려오면 그날의 하루가 시작되고 그곳에서 전달받은 느낌과 감정을 곧바로 글로 옮겨 쓰기도 한다.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 와서 모처럼 홀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숲을 만나서 다행이다. 내게 언제까지 능선 길을 내어줄지는 모르지만 육신이 다하는 그날까지 홀로 능선 길을 거닐어 볼 생각이다.
승상산 능선 길 등산을 마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로에 들어서면 산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비상하기 시작한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인도에 내딛는 바쁜 발걸음이 머릿속의 생각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인도를 걸어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등 뒤로 떠오른 태양이 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등을 떠민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내딛는 발자국에 힘을 주면서 터벅터벅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