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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Jun 15. 2022

결정 장애의 하찮음

혼자 살기로 했다(12)


시장에 반찬가게가 2곳이 있다. 깨끗한 냉장고 안에 플라스틱 팩으로 포장해서 파는 가게가 있고, 커다란 양푼에 담아서 비닐을 덮은 채 파는 가게가 있다. 일반적이라면 보기에도 깨끗하고 위생에 신경 쓰는 가게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커다란 양푼에 담은 채 주인 마음대로 담아서 주는 반찬가게를 간다.


“미역 줄기 있어요?”

“날씨 때문에 금방 상해서...”


“취나물은 있어요?”

“방금 전에 다 나갔는데...”


“뭐가 제일 잘 팔려요?”

“고루고루 나가는 거 같은데...”


한 번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양푼을 놓아두는 좌판은 오래돼서 낡았다. 바닥은 기름과 먼지가 눌어붙었고 어떤 양푼은 비닐을 덮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가게로 간다. 이유는 하나다. 반찬들이 내 입맛에 맞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나는 반찬가게만 가면 매번 망설인다. 망설일 때는 일부러 핸드폰을 들고 문자라도 보내는 척한다.


‘짠 건 싫어. 너무 매우면 안 돼. 맨날 먹던 거 말고. 중국산일까? 날씨가 더워졌는데 괜찮을까? 조미료는 얼마나 넣었을까? 설탕 범벅은 아니겠지?’


나는 결정 장애다.

우유부단하고 선택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 그랬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당신이 그것을 선택했다고 해서 미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맞다. 자장면 대신 짬뽕을 먹었다고 미래는 달라지지 않는다. 참치김밥 대신 채소김밥을 먹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는데, 알면서도 나는 매번 선택의 순간이 어렵다. 그러다 보니 한 번 결정한 것은 바꾸지 않는다.


다니던 카페에서만 글을 쓰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분명 ‘다음엔 밀크티를 마셔야지.’라고 결심해놓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메뉴 많은 식당을 가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요양원에 선물로 갖다 드릴 과일을 고를 때면 마트 직원이 답답해하다가 다른 일을 보러 간다. 머리를 길러야 하나? 잘라야 하나? 한 달 넘게 고민한다. 립스틱 하나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가면, 수십 가지의 색상 앞에서 얼어붙는다. 서점에 갈 때는 반드시 어떤 책을 살지 미리 결정한 다음에 간다.




나는 나의 하찮음에 가끔 좌절한다. 반찬가게 앞에서 문자 하는 척 연기하는 내가 한심하다. 그까짓 게 뭐라고 망설이는 것이 어이가 없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나를 매 순간 발견한다. 별것도 아닌 선택에 의미부여를 하는 내가 참 부담스럽다.


하지만 꼭 빠르게 판단하고 선택할 때가 있다. 아이들과 있을 때다. 글쓰기 수업은 매 순간 변수가 발생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이의 마음을 최대한 빨리 짐작하고 대처해야 한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이 있다면 1초 안에 판단해야 한다. ‘혼내야 할까? 설명해야 할까?’ 다행스럽게도 아이들 앞에서 만큼은 나의 고질적 결정 장애는 발현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결정에선 시간이 걸려도 늘 스스로 판단을 해왔다. 고민을 거듭하고, 실패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혼자 살겠다는 결정도, 글을 계속 쓰겠다는 결정도 타인의 허락은 필요 없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면 된다.


그런 면에서 다행이다. 내 결정 장애의 정점을 찍는 곳이 반찬가게 앞인 것이 말이다. ‘떡볶이를 먹을까? 쫄면을 먹을까?’로 친구와 깊은 고뇌에 빠지는 정도여서 다행이다.


브런치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작년 9월이었다. ‘할까?’, ‘말까?’의 고민을 6개월에 걸쳐서 하고 겨우 시작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나는 결정 장애를 겪는다.


“발행 버튼을 누를까, 누르지 말까?”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을 겪은 후에야 발행 버튼을 누른다. 끝이 아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발행을 한 후에도 또다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글에 남겨진 댓글 앞에서 또 망설인다.


“답글을 달아야겠지? 뭐라고 하지? 길게 쓰나? 짧게 쓰나? 빈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텐데.”


결국 결정 장애 때문에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나는 나의 하찮음을 또 확인하고 만다.


이제 겨우 두 달 정도의 경험밖에 없는 브런치 신입생으로 지금은 진심으로 쓰겠다는 마음 밖에 없다. 내가 과연 1년은 채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간에 멈추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되고 싶다.


조금 서툴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그 반찬가게 같았으면 좋겠다. 조미료 없이 심심하지만 먹으면 또 생각나서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가게. 대답은 시원치 않지만 부끄럽지 않은 반찬을 만드는 주인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결정 장애에 빠진다.


다음엔 뭘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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