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의 소녀는 단정하게 앉아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소리 없이 차를 마셨다. 소녀의 앞에는 동그란 소반이 있었고, 그 위에서 모과와 생강을 푹 우려낸 차와 겨울 동안 항아리 안에 넣어 얼려놓았던 홍시가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었다. 호산월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
“부모님께 인사는 잘 드렸소?”
보료에 앉은 호산월이 묻자, 소녀는 찻잔을 내리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궁에서 내준 북어와 콩이랑 소금을 전부 가져다 드렸습니다. 수방 상궁마마께서 따로 주신 솜버선은 어머님께 드렸고요.”
호산월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소. 요즘은 어떤 수를 배우고 계시오?”
“나비를 배우고 있는데, 좀 더 어려운 것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가 상궁마마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소녀는 꾸지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방긋 웃었다. 호산월도 따라서 웃고는 옆에 놓아둔 보자기 싼 것을 앞으로 밀었다. 소녀가 일어나서 보자기를 가져다가 풀었다. 맨 위에는 볼끼가 있었고, 그 아래 토시, 남바위가 있었다. 검은색 비단과 하얀 토끼털로 만들어진 방한용품을 보고는 소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상급 비단과 가죽으로 하면 다른 생각시들이 시기할 수도 있어, 중급으로 만들었소. 또 잡귀들이 시기할 수도 있어, 화려한 색은 피했고.”
“감사합니다.“
“맨 아래 종이로 싼 것은 말린 감국이요. 수놓느라 눈이 아플 때 뜨거운 물에 우려서 마셔도 좋고, 수놓은 향낭에 넣어 다녀도 좋소.”
“예.”
“임금께서는 연초 향을 싫어하시니, 혹여 수방 나인들이 연초를 권해도 공손하게 거절하시오.“
“예.”
소녀는 검은색의 방한용품을 소중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보자기를 다시 묶었다. 그런 소녀의 움직임을 유심히 바라보는 호산월의 눈빛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흐를 때,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스님 한 분이 만나 뵙고 싶다 합니다. 동짓날 밤에 반촌 주막에서 뵈었다네요.”
호산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방 생각시도 따라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송화루 어린 하녀와 남자 가노가 별채 마당에 서 있었다. 생각시는 얼른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항아님을 궁문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일전에 준비하라고 한 것을 항아님 사가에 전해주게. 설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예. 어르신.”
가노는 수방 생각시를 데리고 송화루 별채를 빠져나갔다. 소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던 호산월이 하녀를 따라 손님방으로 향했다.
소사랑의 손님방 문을 열자, 승복을 입은 스님이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에게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빨지 않은 승복은 군데군데 흙물이 들었고, 손은 주름지고 거칠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활인서 일이 많이 힘드십니까?”
“힘들게 뭐가 있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버려진 시체 묻어주고, 버려진 뼈들 묻어주고, 버려진 아이들은 활인서에 데려다주고. 하아....”
깊은 한숨 소리에 섞여 나온 냄새를 맡고 호산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아주 큰 덫에 걸린 듯하네. 그놈들이 술 한 병을 미끼로 내 코를 뀄어. 수수든 콩이든 아니면 말린 감이든, 다음에 와서 달라기에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 술을 다 마셨지. 염병.”
“거기가 어딥니까? 혜화문 밖입니까?”
“종묘 아래, 배오개 고개 쪽일세.“
“몇 번이나 가셨는데요?"
“네 번을 갔지. 안 가려 했는데, 그 집 술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술과 함께 나온 그 ….”
매골승은 차마 그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깊은숨만 들이켰다 내쉬었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호산월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작은 방 안은 창문도 미닫이문도 모두 닫혀있어, 그의 숨에서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더럽혀진 냄새가 호산월을 참을 수 없게 했다. 호산월은 더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비하고 나올 테니 밖에서 기다리세요.“
생각지 못한 호산월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매골승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올려다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매골승을 두고 호산월이 그 방에서 나왔다. 별채로 걸어가는 동안 호산월은 두 번 걸음을 멈추고 어지러운 것이 멈추기를 기다려야 했다.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먹었구나…”
해가 낙산 너머로 조금씩 내려갈 즈음 호산월은 남바위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송화루를 나섰다. 매골승을 앞세우고 호산월은 배오개 고개 쪽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해는 낙산 너머로 사라졌고, 섣달의 보름달이 높이 떠올랐다. 운종가를 지나 배오개 고개를 넘으니 인적이 점점 줄었다. 조금 더 가자, 주위가 어두컴컴해지는 길에 유난히도 밝은 불을 켜놓은 주막이 보였다.
짚으로 올린 초가는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을 두고 마루가 아주 넓었다. 마루 앞에는 아궁이 하나를 두고 젊은 여주인이 뒤집어 놓은 가마솥뚜껑에 녹두전을 지지고 있었다. 돼지비계 기름에 지글지글 지져지는 노르스름한 녹두전이 먹음직해 보였다.
“아이고! 또 오셨어? 와요. 와. 여기 앉아요.”
매골승과 호산월이 마루 가까이 가 앉았다. 마루 안쪽에 다른 손님이 있었는데, 어린 남자와 나이 든 남자 둘이었다. 두 남자는 맑은 한주에 녹두전을 먹으며 호산월을 힐끗거렸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오? 향기로운 것이 사대부가 마나님은 아닌 듯하고, 농부의 아내도 아니고, 사당패도 아니고 술 냄새도 없는 것을 보면 기생도 아니고, 궁녀도 아닌 듯한데. 우선 술이나 한잔 받으시오.”
주막의 여주인이 옆에 놓인 술 항아리에서 국자를 떠 술그릇에 따라 호산월과 매골승 앞에 놓았다. 매골승은 쭈뼛쭈뼛 술그릇 앞에서 망설이는데, 호산월이 술을 냉큼 마셔버렸다. 쌉싸름하면서도 독한 것이 입안을 후끈거리도록 했다. 호산월이 술잔을 내려놓는데, 부엌에서 남색 무명 두루마기에 흰 두건을 쓴 남자가 접시 두 개를 들고 나와서 하나는 호산월이 앉은 마루 위에 놓고, 하나는 두 남자가 마주한 소반 위에 올렸다.
“귀한 건데, 단골이라서 주는 거니까, 한 점씩들 해요.”
여주인의 말에 안쪽에 앉은 두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뻘건 술안주를 냉큼 씹어 삼켰다. 호산월이 여주인이 건네는 젓가락을 받아 들자, 매골승이 미간을 모은 채 호산월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호산월은 마루에 걸터앉아서는 접시 위에 든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빨간 것이 참으로 색이 곱소. 이게 수박은 아닌 듯하고, 앵두정과도 아닌 듯한데.”
그러고는 호산월이 젓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놓은 음식에서 빨간 핏물이 흐르고, 젓가락을 놓자 탱글탱글하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음식이 익숙한 듯 매골승은 시선을 돌렸다.
“에그머니! 설마 ... 짐승의 생간이요?”
“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 번 맛을 보세요. 아주 달고 고소할 것입니다.”
매골승은 인상을 찌푸리며 역겨운 표정을 보였지만, 호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가 젓가락으로 작은 조각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토끼 간을 먹으면 용왕도 무병장수한다던데, 이건 도대체 어떤 짐승의 간일까?”
“먹어 봐요. 먹어보면 알지.”
주막 여주인이 엉덩이를 움직여서 호산월에게 다가와 먹으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마루 안쪽에 앉은 두 남자가 고개를 돌려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호산월은 빨간 간 조각을 든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슴의 생간은 섣달의 긴긴밤을 보내는 남정네에게 좋다지요? 소의 생간은 여인이 더욱 아름다워진다는데, 이건 도대체 어떤 동물의 간이려나?”
“거 말도 많다. 궁금하면 먹어 보지.”
마루 안쪽에 앉은 어린 남자가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마주 앉은 나이 많은 남자가 고개를 돌려 호산월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두툼한 창옷에 초립을 쓴 남자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수염이 굽슬굽슬했다.
“두 분도 드셨습니까? 술값은 무엇으로 내셨습니까? 요즘 같은 흉년에 쌀 구하기도 어려울 터인데. 이거 한 접시는 얼마나 합니까? 지금 내가 가진 거라고는 은가락지뿐인데.”
여주인은 입술에 힘을 꽉 주고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호산월의 질문에 대답했다.
“수수든 콩이든 아니면 말린 감이나 대추 같은 걸로 셈하면 됩니다. 다음에 지나가는 길에 뭐든 좋으니 가져다주세요.”
대답은 자연스레 나왔지만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듯했다. 백분을 바른 뽀얀 얼굴이 점점 붉어졌고, 연지를 바른 입술은 자꾸 씹어대서 붉은색이 흐려졌다. 미묵으로 그린 검은 눈썹이 점점 더 좁아져 서로 붙을 듯 가까웠다.
“이 간이 무슨 간인지를 알아야 내가 셈을 제대로 할 것 아닌가? 쥐의 생간을 먹고 소의 생간이나 사슴의 생간 값을 치르면 내가 손해지.”
“쥐라니! 우리를 뭘로 보고.”
마당에 서있던 주막의 숙수가 버럭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저음의 큰 목소리에 매골승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호산월은 생간을 집은 젓가락을 숙수에게 보이며 대꾸했다.
“그럼, 이것이 어떤 동물의 생간인가? 신선한 향기에 핏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오늘 아침에 잡은 것 같은데. 도성에서 함부로 도축할 수 없으니 혜화문 밖에서 몰래 사냥한 것이렸다?”
“그럴 리가 있나. 우선 술이나 한 잔 더 받으시오.”
여주인은 호산월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따르고 조금 더 다가갔다.
“사슴이면 어떻고, 소면 어떻소? 맛있으면 그만이지.”
“그런데 … 이게 만약에 말이지.”
호산월은 말을 꺼내놓고 조금 뜸을 들인 후 여주인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작으니 주막 안의 사내들이 모두 호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약에 …사람의 간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보름달이 처마 위로 높이 떠있었지만 손에 잡힐 듯 크고 둥글었다.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은 달빛 아래 호산월은 피식하고 튀어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를 둘러싼 이들은 모두, 숨소리 같은 웃음도 아름답게 휘어진 눈웃음도 놓치지 않았다. 호산월의 눈웃음으로 그 주위는 순식간에 달빛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2)편은 저녁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