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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풍정 端午風情 (1)

by 김사과


단오를 맞이한 도성의 분위기가 제법 시끌벅적했다. 오랜만에 맞은 대목에 상점마다 물건들이 쌓였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중 몇몇은 돈의문 쪽으로, 몇몇은 청계천 수표교로 가는 것이 보였다. 호산월은 옆으로 뛰어가며 떠드는 아이들의 말에 피식 웃었다.


“만리재는 너무 멀잖아. 그냥 수표교로 가자.”

“수표교는 쌈이 너무 작아. 만리재가 제대로야. 빨리 와. 빨리.”


종루 앞에 몰려 앉은 사람들을 따라 호산월도 잠시 멈춰 섰다. 누군 서서 구경하고 누군 주저앉아 구경하는 그 가운데에, 샅바를 한 남자 둘이 웃통을 벗고 힘을 겨루었다. 한쪽이 힘을 주면, 한쪽이 들어 올려지고 다른 한쪽이 힘을 주면, 상대가 다리로 버텼다. 그럴 때마다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추임새를 넣었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 씨름판을 뒤로하고 호산월은 광통교를 향해 걸었다.


멀리 서화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점포마다 그림과 글씨를 걸어두었고, 흰 도포에 갓을 쓴 화가들이 마루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평온했다.


오늘 호산월이 찾아온 곳은 광통교와 도화서 사이에 있는 강씨네 서화점이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서는데, 주인장 강씨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린 아들을 혼내고 있었다.



“난리 났네. 주인한테 묻지도 않고 판다고 하면 어째? 수틀리면 그림을 두 조각으로 찢어놓고도 남을 양반들인데.“


도화서 견습 화원인 강씨의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호산월은 전모를 벗어 마루에 올리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마침 잘 왔네. 지난번 맡긴 그 그림말이야 사겠다는 선비님들이 있는데, 어떤가? 좋은 가격에 넘기는 게?”


“표구는 끝났습니까?”

“그럼.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나.”


강씨가 옆 방으로 그림을 가지러 간 사이, 그의 아들이 호산월의 눈치를 살폈다. 열다섯의 도화서 견습 화원인 강씨의 아들이 머뭇머뭇하다가 호산월 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두 양반 나리들께서 하도 다그치는 바람에 ... 예,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허락도 없이 약조해 버려 송구합니다.”


강씨가 두루마리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창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그림이 잘 보이도록 벽에 걸자, 눈 쌓인 설산을 걸어 내려오는 하얀 호랑이가 나타났다.




강씨는 한 대 쥐어박을 것 같은 얼굴로 아들을 보다가도 호산월의 눈치를 살폈다. 호산월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귀를 쫓는 데는 호랑이만 한 게 없지. 흉년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네. 올해도 역병이 창궐하지 않겠냐고.”

“진휼청 곡물도 바닥났다던데, 도성에 역병까지 돌면 큰일이네요.”


“그렇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런 그림 몇 장만 더 그려줄 수는 없겠나? 기생 일을 그만두고 시간도 남을 텐데, 뒷방에서 밥만 축내며 늙느니 돈벌이라도 하면 좋지 않겠어?“


“비슷한 거 하나 더 그린다고 두 선비께서 이 그림을 양보하겠습니까?”


호산월의 말에 강씨와 그의 아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두 선비가 아주 유명하다네. 물건 하나를 두고 둘이 싸우다가 물건만 망가진 게 한두 번이 아니고, 그걸 또 점포 주인들이 물어낸 걸로 소문이 파다하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강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 한 명이 들어왔다. 쪽빛 도포 차림에 갓을 쓴 키가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자, 강씨는 얼른 쪽빛 도포를 입은 선비 앞으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청천 나으리. 찾으시는 게 있으면 말씀만 해주세요. 단오선도 있고, 적령부도 있습니다. 너는 가서 술을 내오도록 해.”


강씨 말에 그의 아들이 창포주를 담은 술병과 잔을 가지러 갔다.



“완성되었군. 이 그림을 내가 가져가지.”

“보잘것없는 솜씨라서 방에 두고 혼자 볼까 합니다.”


호산월의 뻣뻣한 대꾸에 쪽빛 도포의 키 큰 사내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누구신지?”

“이 그림을 그린 송화루 기생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에 선비는 입술을 씰룩이며 웃었다. 중간에 선 강씨 눈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 남들은 잔뜩 먹고 취하며 노는 날에 이게 무슨 낭패냐 싶었다.

이 사단을 만든 그의 아들이 술잔 두 개를 올린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호산월이 먼저 창포주가 든 술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하지만 쪽빛 도포의 선비는 술잔에 손도 대지 않고, 벽에 걸린 호랑이 그림을 보며 양팔을 꼬아 팔짱을 꼈다.


“난 이 그림이 몹시도 마음에 드니,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기생이라니, 술상 하나 차릴 값이면 되겠지?“


“얌생이처럼 내 그림을 훔치려 하는가? 그 그림은 내 것일세.”


놀란 강씨의 아들은 눈이 동그래져서 문 쪽을 보았다. 그곳에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와 서 있었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다부진 남자는 코와 턱에 잘 다듬은 수염이 난 선비였다. 짙은 자줏빛 모시 도포 차림의 선비를 향해 강씨가 또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고원 나으리 ...”




강씨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쪽빛 도포의 청천이라는 선비가 쏘아붙였다.


“얌생이라니? 그게 선비 입에서 나올 말인가?”


두 선비의 말다툼에 강씨는 울 것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열다섯 된 아들은 더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원이라는 호를 가진, 짙은 눈썹과 탐스러운 수염의 선비가 호산월 옆으로 와 벽에 걸린 호랑이 그림을 보았다.


“그림이라 하면 첫째는 대나무요, 둘째는 산수화, 셋째는 인물화지. 이 그림은 벽사용으로 적당하니, 내 집 대문에나 붙여야겠다.“


호산월보다 키가 작은 자색 도포 선비의 말에 쪽빛 도포의 선비가 한껏 목을 늘여서는 눈을 내리깔며 비웃었다.


“그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저 날 때부터 달려서 갖고 다니는 눈이로군.“

“쯧쯧쯧 … 선비라는 작자가 그림의 기본도 모르니, 답답하군.”


“두 분 그러지 마시고, 그림 주인의 말을 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강씨의 말에 두 선비가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산월이 창포주를 홀짝이다가 입을 열었다.


“천한 기생이 무엇을 알겠소? 주인장의 아드님이 도화서에 계시니 고견을 들어봅시다. 이 그림은 좋은 그림입니까? 그저 벽사 부적입니까?”

모두의 시선이 강씨의 아들, 강창희에게 쏠렸다. 열다섯의 견습화가는 숨이 턱 막혀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소년이 쥐어 짜낸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인은 화원이 아니라, 이제 겨우 4년을 배운 견습생도입니다. 아직 시취를 통과하지 못하여 화원의 자격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제 아들은 아직 많이 어려 … 투석전이나 보러 다니는 아이입니다. 너, 수표교의 투석전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강씨는 이 난처한 상황에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투석전을 들먹였다. 어떻게든 관심을 돌리려 강씨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들썩였다.


“크기로 치면 만리재 고개에서 하는 투석전이 최고지만, 여기 수표교 싸움도 볼만할 것입니다. 손님들도 가시겠습니까?”


강씨의 말에 호산월이 한마디 거들었다.


“웃대와 아랫대의 돌팔매 싸움이니 쉽게 물러서지는 않겠네요.”


그렇게 말한 호산월은 시선을 돌려 두 선비를 바라보았다. 쪽빛 도포의 키 큰 남자는 어깨를 쫙 펴며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남인과 북인인가?


그의 말에 자색 도포의 선비가 짙은 눈썹을 꿈틀대며 되받아쳤다.


“보나 마나 웃대가 이기겠군. 싸울 줄 아는 건 북인이지. 남인 나부랭이들은 싸울 줄을 모르니까.”


두 선비는 호산월을 사이에 두고 눈빛이 사나워졌다.




“북인은 의리라고는 쥐뿔도 없고, 권력 잡기에 눈이 뒤집혔다던데?”

“죽은 놈들 자리싸움보다야 낫지. 그래서 퇴계 선생 우측에 서는 건, 나이 많은 학봉인가? 영의정이었던 서애인가?”


키 작은 고원 선비의 비웃는 표정에, 희멀건 낯빛의 청천 선비는 입술을 꿈틀대다가 속엣말을 꺼냈다.


“뜻이 바로 서지 않았으니, 대북 삼창이 나라를 말아먹는데도 제 이익 찾기에 급하지. 민본 정치? 지랄을 하시네.”

“야! 지랄? 지라알? 이 남생이 새끼가…“

“새끼? 그래! 가보자. 어?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봐.”


남인의 선비와 북인의 선비가 동시에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호산월은 들고 있던 창포주를 마저 비우고 잔을 쟁반 위에 올렸다. 단오의 가장 큰 재미는 석전놀이일 터, 호산월은 거절하지 않고 강씨의 서화점을 나섰다.



* (2)편은 저녁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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