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현재의 내가 해석하고 결론내리는 것
시골에서 아빠가 보내주신 택배박스를 받았다.
직접 키우신 작물들이 택배 안에 그득그득 했다.
대파, 오이, 상추, 자두, 살구, 블루베리, 그리고 마늘.
마늘 비싼데 잘됐다. 마늘 까서 갈아서 얼려놔야지.
아빠께 잘 먹겠다고, 감사하다고 전화를 하고
마늘을 씻어서 일단 불려 놓았다.
밤에 식탁에 앉아서 마늘을 까는데
갑자기 쁘나한테도 마늘 한번 까볼래?
별 의미없이 제안했는데
하겠다고 해서
쁘나 손에 장갑도 끼워주고
칼 쓰는 법도 알려주고
(칼은 사용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냥 손으로 까라고 했다.)
같이 마늘을 까는데
잊고 있었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이 기억을 잊고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마늘에 관한, 그 기억.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셨다.
우리 집은 그날부터
하루가 멀게 엄마, 아빠는 다투셨고
점점 그 싸움은 집안 물건이 깨지고,
고성으로 치달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어느날, 엄마 아빠는 시장에서 채소가게를 하신다고 하셨다.
엄마, 아빠의 채소가게는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중충한 회색빛 시멘트 바닥에
어디 앉을 데도 없는,
채소가 가득가득 놓인 공간이었다.
그때부터 아빠가 노란색 컨테이너 박스에
물에 불려둔 마늘을 가득 담아서
집 현관에 두고 가면
우리는 그 마늘을 까는 일을 해야 했다.
깐 마늘은 좀더 비싸게 팔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티비를 보면서
(대개 OCN에서 하는 영화를 보면서)
마늘을 엄청나게 깠다.
나는 손이 좀 야무진 아이였었기 때문에
꽤나 도움이 되는 노동력이었다.
밤 12시가 넘어 들어오시는 엄마, 아빠는
3-4시간도 못 주무시고
새벽 4-5시면 우리가 까놓은 마늘을 들고
다시 가게로 나가셨다.
나는 마늘 까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손으로 하는 일은 다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도 마늘에 대해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다.
마늘보다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건
밤이 되어도 오지 않는 엄마, 아빠.
두 분이서 가게에서 또 싸우시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걱정하던 마음은 기억이 난다.
아빠는 원래 농협맨이었다, 잘 나가는.
평생을 (아빠는 21살 때 농협맨이 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한평생을 책상에서 주판만 튕기던 엘리트였다.)
서류에 도장만 쾅쾅 찍던 사람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하게 된 몸쓰는 일에 굉장히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우리 삼남매 키워야지,
6형제 중 장남으로서 동생들 뒷바라지 해야지,
연로하신 부모님 모셔야지,
엄마, 아빠는 쉴 수가 없었다.
아빠는 밤 12시에 들어오시면
옷만 갈아입으시고
다시 나가셨다.
트럭을 몰고 전국을 다니며
현지에서 최대한 싸게
채소를 떼와야 하니까
밤에 출발을 하셔야 했다.
나는 그런 아빠가 졸음 운전을 해서 죽을까봐,
그렇게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떼를 써서라도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운전하는 아빠 옆에서
내가 쉬지 않고 이야기를 걸면
아빠는 졸지 않고 운전을 하실테니까.
나는 우리집에서 자타공인
수다쟁이 주둥이였으니까.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아빠를 따라 새벽에 트럭을 타고 출발해
우리는 강원도로, 땅끝 마을로, 부산으로
전국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채소를 사왔다.
나는 아빠 옆에서 신나게 떠들었다.
아빠가 내 이야기에 웃고, 잠을 쫓고,
조금이라도 그 무거운 어깨가
웃음으로 가벼워졌음 해서
나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도 좋았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든 아빠와
오로지 나만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2-3년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는 점점더 지치셨고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둔 크리스마스 밤,
없는 돈을 모아 케이크를 사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빌기 위한 파티는
엄마, 아빠의 심한 다툼으로 파토가 나고
아빠는 결국 "내가 죽어야지."
그 말을 뱉으시고
현관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아빠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언니, 오빠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고
나는 잽싸게 아빠를 뒤따라 나섰다.
빠르게 차를 향해 걸어가시는
아빠 소매를 붙잡고
"아빠 가지마, 아빠 죽지마," 하는데
눈물이 펑펑 났다.
세상 사람들은 밀레니엄 시대가 온다고
폭죽을 터트리고, 환호성을 지르는데
우리집은 처참하기만 했다.
나를 떨어뜨리려고 아빠는 나를 밀쳐냈는데
나는 끝까지 아빠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빠의 옷소매가 찢어지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아빠는 소리치셨는데
나는 그때 무조건
아빠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넋이 나갔었던 것 같다.
그날, 결국 아빠는 나를 두고
차를 타고 가버리셨다.
그 다음날 돌아오시긴 했지만
나는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집은 그 날 이후로 한동안은 계속 힘들었지만
엄마, 아빠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지금은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두분이서 텃밭도 가꾸시면서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지금도 뭐, 두 분 사이가 좋진 않지만
그래도 이혼하지 않으시고
같이 사시니까.
마늘을 까면서
이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마늘과 그때 그 채소가게 시절의 일들은
내게 엄청난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긴 기억이지만
일상을 살다보니
최근 몇년에는 떠오른 적이 없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내가 이 기억을 언제 떠올렸더라,
기억도 안 날 만큼,
막상 기억하고 나니
굉장히 강렬한 기억이긴 해도
더이상 이 기억이 내 일상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쓰다보니
조금 눈물이 났지만,
10대, 20대 때처럼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작 13살 밖에 안 된 그때의 내가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그때의 나를 위로하게 된다.
그리고 20대까지
그렇게도 엄마, 아빠를 원망했었는데
지금은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신
엄마, 아빠가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어떻게 어린 아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던거야,
아빠는 정말 나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야.' 라면서
속으로 아빠를 비난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안다.
그때 아빠도 고작 44살이셨다.
지금 내 나이와 얼마 차이도 안난다.
40대 초반에 직장을 잃고
퇴직금을 이상한 투자에 다 잃으시고,
처음 해보는 장사가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그때 너무 많이 고생하신 아빠는
텃밭도 하기 싫다고 하시는데
엄마가 워낙 이런 일을 좋아하셔서
(도대체 우리 엄마는 그렇게 고생을 하시고도
텃밭일을 하고 싶으시다니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가 안가지만)
엄마 등쌀에
어거지로 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 혜택을 우리들이 보고 있다.
철마다 제철 채소와 과일들을 보내주시는
엄마, 아빠 덕분에
오늘도 우리 식탁은 더 건강해지고 있다.
쁘나에게 이러한 일까지 이야기하기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채소가게를 하셔서
마늘 엄청 많이 깠었다,
나 마늘까기의 아주 프로야, 프로" 라고만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마늘까기의 프로라고?" 라면서
어이없다고 웃고 만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를 기다리면서 마늘을 깠던 그 시간과
쁘나랑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늘을 까는
지금 이 시간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지만
더이상 내 어린시절이 그저 슬프고,
한스럽지 않다.
그런 일도 있었지,
우리 집 진짜 다이나믹 했었지,
그래도 지금 다 멀쩡히 살고 있네,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오빠도
나도.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내가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
그 시절의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다.
과거는 현재의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우리 가족이 이겨낸 일,
굉장히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극복해낸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과거는 지금의 내가 해석하고 결론내리기 나름일 뿐,
과거는 현재보다 힘이 없다.
힘이 없는 과거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를 사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