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20대의 내 삶의 연대기를 나열한다면 누군가의 팬으로 산 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난 2년 정도의 주기로 항상 누군가의 팬이었었다. 지금까지 그들을 좋아하냐고? 글쎄 그들 각자에게 남은 마음의 색채는 다르지만 그렇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찾아보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추억으로 남았다. 추억은 일상을 살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의 저장소 어딘가에 남아있는 흔적들이고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좋아한 “나”의 젊은 날로 포커스는 이동했다.
얼마 전부터 내가 좋아한 가수들의 옛 노래들이 자꾸 듣고 싶어서 그 음악들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그 시절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H.O.T, 팬이었던 시절,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가기 위해서 대구에 사는 나는 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시내의 제일 은행으로 부모님 차를 얻어 타고 가서 친구와 내내 줄을 섰었다. 공연을 보기 위한 여정은 한없는 기다림이었다. 그 이후에는 팬클럽에서 보내온 버스를 타고 공연이 열릴 예정인 장소에 도착해서 공연장에 도착한 후 공연장에 들어가기까지 몇 시간이고 줄을 섰고(끝이 안 보일만큼 긴 줄이었다) 공연장 안에 들어가서는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전광판에 나오는 오빠들을 보며 그곳에 모인 팬들 모두 열광하며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다림의 끝에 나의 우상이 등장하면 마음은 기다린 만큼의 기대로 이미 포화 상태였던지라 터질 듯이 울렁거리고 긴 기다림이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의 짜릿한 환희를 맛봤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기다림 끝에 오는 그 기쁨에 중독되어 많은 것들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 기다림에는 “기대”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 발매 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 발매 일이 되면 레코드 샵 오픈 전부터 나와 같은 뮤지션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줄을 서고 오매불망 레코드 샵의 문이 활짝 열리기만을 기대한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CD를 받아 들었을 때 그 CD를 스크래치라도 날 까 모시듯 들어서 CD플레이어 안에 넣고 첫 곡이 재생될 때의 기분은 속된 말로 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달콤하고 마약 같은 음악이라니.... 유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묘약으로 귀를 적시며 하루 종일 황홀경에 취해있던 그 순간들.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잡지의 발행일을 기다리고 이미 씨네 21을 훑어보며 보고 싶은 영화로 찜해놓은 영화의 개봉일을 기다리고 그 찰나의 순간의 행복을 맛본 뒤 얼마간은 그 달콤함을 곱씹는 것으로 일상의 활력을 삼았던 나의 20대의 기억들
지금은 그렇게 밤새 공연장 앞에서 줄을 서라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체력의 문제도 있지만 똑같이 줄을 서고 기다린다고 해도 그때와 같은 순수한 기대를 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한 시절 열렬히 좋아한 것들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자발적인 고생에 뛰어들었던 경험들은 나에게 진한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서진아 그렇게 덜덜 떨어가며 한 겨울에 밖에서 그들을 기다릴 만큼 그 오빠가 좋았니?”
라고 물어본다면 그 시절의 나는 아마 지체 없이 “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어린 나를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
그 마음은 즐거움의 핵에 도달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기분 좋게 일렁이는 마음이다. 바라던 것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었을 때는 정작 제대로 된 실감이 나지 않지만 기대하는 마음으로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시도하고 기다릴 때 우리는 그 상기된 마음으로 인해 들뜨고 인식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린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방황하고 우울하고 세상에 냉소적이고 비관적이었지만 그 기대하는 마음만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처럼 기대하는 마음으로 핼러윈을 즐기러 나간 젊은이들을 생각한다. 공부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타국으로 유학을 와서 일상을 살다가 핼러윈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거리로 나섰을 젊은이들. 그들에게 그 거리는 기대를 실현해줄 공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일상을 살았든 누구에게나 그런 기대를 품는 날들이 있고 그런 기대는 혼자가 아니라 같은 마음을 가진 군중과 함께 할 때 더 증폭되고 커져서 그날은 마음을 풀고 온전히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하며 어떤 특정 장소로 모이는 것이다. 그들의 상기된 마음이 한순간에 상상하지 못한 결과로 변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사람이 꽉꽉 들어찬 공연장을 쫓아다니고 클럽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팔다리를 제대로 뻗지도 못하며 춤을 췄을 때도 나는 한 번도 내가 그 사람들 사이에서 압사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만이 가득했던 순간이었다. 인터넷에서 이 참사로 인해 ‘기성세대가 뭘 미안해해야 하나요’란 글을 보았다. 핼러윈이란 서양 축제를 젊은이들이 “즐기러”갔다가 당한 사고인데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왜 미안해할 일이냐는 글이었다. 만약 내가 20대의 어느 날 공연을 보러 갔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 또한 ‘팬질을 한다고 공연장 가서’, ‘놀기 좋아해서 클럽을 가서 죽은 젊은이‘니 안타깝지만 그뿐이라는 말을 들었겠지. 강제된 애도 기간이 지난 후에 10.29 참사 소식은 잘 들리지 않고 세상은 다시 다음 주에 시작될 월드컵과 (축소된)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뜨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들도 살아있었더라면 이 날들을 온전하게 즐겼을 것이다. 나의 연말을 기대하면서도 그 젊은이들의 다시 오지 않을 연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핼러윈을 없애고 크리스마스의 기대를 줄이는 방식이 희생자들을 기리는 방식일까. 그 아이들은 핼러윈을 “기대”했을 뿐인데 그 아이들의 “기대”가 잘못되었고 그런 날을 이제는 “기대”하지 말라는 방식은 “그런 축제를 이제껏 즐기고 누려왔지만 이제는 크게 아쉽지 않은 기성세대“로 접어들었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정말로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즐겼고 이제는 아쉽지 않지만 너희들은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니 즐기지 마라? 그 젊은이들은 축제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이 모두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그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축제는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