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미?
주말에 팀원 결혼식을 가면서 버스 안에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를 잠깐 보았다.
사실 드라마의 내용이 기시감이 들면서 너무 상상돼서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아마도 지금은 남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흔한 꼰대 김부장이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서 잘 풀리던 회사 생활이 꼬이게 될 테고, 그러면서 가족들과도 문제가 발생할 텐데 그러다가 그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등장인물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가족들과 관계도 오해를 풀고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서고 최종적으로는 성공한다는 해피엔딩 일 듯했다.
이런 얘기를 와이프에게 하면 분명 핀잔을 들었겠지. "드라마를 너무 분석하면서 보지 말라니까. 그러면 나도 드라마에 흥미가 떨어지니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봐주겠어?" 웃으며 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근데 어쩌겠는가, 제목만 봐도, 썸네일만 봐도 대략 상상이 되는데.. 그래서 요즘은 여간하면 이런 예측은 와이프와 함께 볼 때는 참고 있다.
그런 흐름의 눈치가 빠른 나이기에, 내 인생이란 드라마도 곧 정점을 지나 내리막을 걷게 될 거란 느낌이 요즘 들어 많이 들었다.
10대에야 아무것도 모르고 놀거나 하란대로 공부하기 바빴고, 20대에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이것저것 찔러보기 바빴고, 30대에는 결혼하고 애 키우기 바빴다. 다행히 그러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많진 않지만 차곡차곡 돈을 모아 앞서 말한 드라마처럼 집도 사고 작은 조직의 리더도 되었다. 요즘은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체중도 조절하고 근육도 붙어서 제법 봐줄 만한 몸도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얼마 있으면 끝이겠지?
어차피 천룡인이 아닌 외부인이기에 임원이 되긴 어렵겠고, 밑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이 웃으면서 커가니 언젠간 이 자리도 그들 중 한 명에게 내줘야 하겠지.
예전에는 발목이 삐거나 해도 하루 이틀이면 금세 나았는데, 조금 무리해서 뛰었더니 일주일이 넘게 뻐근함이 이어지는 발목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나도 늙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마 몇 년 후면 아픈 데는 더 늘겠고, 지금처럼 마음껏 운동하기도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와이프와 관계야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아도 익숙함에 크게 싸울 일이 없어진 안정기에 들어섰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지금에야 아빠가 같이 놀아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가끔 날 찾고 따르겠지만, 더 크고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더 좋아지고, 공부에 부담이 커질수록 나와 멀어지고, 집에 오면 자기 방 문을 쾅 닫고 하숙생 처럼 되는 날도 멀지 않았을 듯하다.
정점이 지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모든 불안은 기대에서 비롯된다고 책에서 봤던 것 같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불안도 스트레스도 없다. 정점은 언젠가 지날 수밖에 없다. 인생의 그래프는 주식처럼 장기적으로 우상향일 수 없다. 언젠간 꺾이고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서서히 낮아지며 죽음을 맞이하겠지.
인생의 아웃풋이 낮아지는 만큼 내 기대치를 낮추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회사에서 더 진급을 못할 때가 온다면, 회사를 아직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퇴직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퇴직 후에 기존 같은 일자리를 못 얻는다고 슬퍼할게 아니라 기준을 낮춰서 일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몸이 아픈 곳이 늘어나도, 뛸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뛰지 못한다면 걸을 수 있음에,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면... 아 그건 상상하기 싫다. 할 수 있는 작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
아들 녀석도 귀여운, 다정한 모습은 사라지겠지만, 내가 그랬듯 더 크면 언젠가 아빠를 찾을 때가 오겠지. 아빠와 술 한잔 해줄 때가 오겠지 하는 기대에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정점은 언젠가 지난다. 하지만 정점이 지났다고 꼭 슬퍼야 할 필요는 없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내 상태를 파악하고, 내 기대치를 그에 맞게 조정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게 정점을 맞이하는 4~50대가 해야 할 준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