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민감한 연말 평가 시즌
직장인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직장인의 열폭 버튼’, 즉 역린(逆鱗)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제도 하나가, 가만히 있던 직장인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역린 중에 기억나는 게 세 가지가 있다.
바로, 식사, 급여 그리고 평가이다.
일을 한다는 건 결국 먹고살기 위한 일이다.
그래서 직장인의 세계에서 ‘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존재의 상징이다.
커뮤니티에서는 구내식당 사진 한 장으로 회사의 순서가 나뉜다.
- 군대처럼 식판에 밥과 국, 그리고 허술한 반찬이 나오면 ‘좃좃소’,
- 국이 따로 담기고 후식이 따라오면 ‘좃소’,
- 원형 식판에 자율배식이면 ‘좋소’,
- 메뉴 선택이 가능하고 비주얼이 괜찮으면 ‘대기업’
사실 외국인들에게는 이건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외국, 특히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권에서는 점심 식사는 대부분 집에서 간단히 싸 온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먹거나, 회사 근처의 케밥이나 라이스볼 같은 걸 먹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별도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하며 적당히 먹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밥은 또 다른 의미이다. 괜히 인사말이 '밥은 먹었니?'가 아니겠는가.
나는 집보다 회사에서 밥을 더 많이 먹는다. 그래서 식당 이모님이 엄마 같고, 회사 김치가 엄마 손맛 같다. 삼시 세 끼를 회사에서 때우는 경우도 많은 걸 보면 우리 회사는 적어도 ‘좋소’ 정도는 되는 듯하다.
직장인에게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되는 건 역시 급여, 돈이다. 10년 넘게 다녔는데도 월급이 200만 원대라며 푸념하는 글을 보면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다가도, 천만 원 넘게 받는 사람의 인증글을 보면 ‘나는 왜 이 정도일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급여는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긴 하지만, 커다란 역린까지는 아닌 경우가 많다. 마치 중세시대 귀족사회처럼 좃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주의 땅 크기를 보며 부러워하는 소작농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대기업에 취업을 못하느니 그냥 쉬겠다는 말도 많이 나온다. 내 계급이 확정되는 게 당장 돈을 못 벌어서 궁핍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일 것이다.
어떤 이의 급여가 '이 사회에서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나’를 낙인찍는 듯하여 급여는 씁쓸한 역린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급여는 결국 ‘내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 진짜 역린은 아니다.
최근 모 대기업의 평가 결과를 포함한 인사 기밀이 유출되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생산 중심의 회사인데도, 비생산 부서인 재무, 진단 직원들이 높은 고과를 독식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월급 차이로 보면 10%도 안 되는 금액이었겠지만,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나름 애사심을 갖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는데 난 결국 2등 직원인가 하는 그들의 자존감이 흔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해 대기업에 들어왔는데, 부서 때문에 내 평가가 낮았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직장인에게 평가는 곧 존재의 증명이다. 매년 이 즈음에 성과는 간단히 업적 평가라는 수치로 환산되지만, 그 뒤에는 한 해를 버틴 시간과 땀이 있다.
그래서 평가 시즌이 되면 모두가 예민해진다. 내가 올 한 해 고생한 건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시기의 회사 복도는, 봄철 정전기보다 더 많은 감정이 오간다.
생각해 보면 세 가지 모두 결국 ‘공정성’으로 귀결된다.
누군가 더 좋은 밥을 먹는 것,
누군가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것,
누군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그 자체보다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직장인은 참았던 감정을 터뜨린다.
그렇기에 팀장으로서 부서원 평가는 조심스럽다. 최고점을 받은 친구가 아니면 다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 다 최고 등급을 줄 수도 없고 결국 나중에 불편한 평가 결과 면담을 해야 한다.
이미 평가는 끝났지만 오늘도 자기 전에 고민해 본다. 광수님에게 미연님에게 주호님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결과를 말해줘야 할까. 근거를 준비해 보고 중간 면담 때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줬었지만 조심스럽다. 그들의 간절함을 아니까. 올 한 해 그들의 열정을 아니까.
그리고 또 이런 고민을 해본다.
“나는 올해, 어떤 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을까?”
내 위 상사에게, 그리고 내 팀원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