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 ep.1) 혼돈 속에서 난 관찰자일까, 당사자일까
뉴스에는 나도 몰랐는데 그룹의 사장단 인사가 벌써 올라온다. 나와는 다른 차원에 계신 분들이라 그런가 보다 한다. 사실 사장단 인사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건 그 이후에 이어지는 관계사별 임원 인사이다.
어떤 임원이 새로 임명되고, 어떤 임원이 집에 가고는 관리자 입장에서는 영향이 크다. 그에 따라 내 안위도 결정될 수 있으니.
새로운 임원분이 오고, 기존에 있던 임원분은 다른 부서로 옮기신단다. 사실 기분이 좋았다. 그분이 날 그렇게 좋게 봐주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발표가 난 다음날 임원분이 날 부른다.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미르 님, 다른 부서의 부서원들은 발전되는 게 보이는데, 미르님네만 발전되는 게 안 보여요. 그래서 내가 부정적인 피드백도 많이 주고 했는데, 바뀌질 않네요. 그래서 이번에 미르님 부서의 리더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미르 님은 다른 팀으로 이동하게 되실 거예요. 이번 기회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으세요. 이른 나이에 팀장이 된 게 오히려 미르 님에게는 독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치열하게 일해보고 아직 관리자풀에 있는 거니까 다시 기회를 잡아보세요."
"네, 제가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기대에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옮겨서 보완하여 잘해보겠습니다."
"그런 통상적인 말을 하지 말고, 사람이 자신을 대변하려고 하면 안돼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봐야 해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가. 그리고 부서원들의 겉모습을 믿지 마요. 옮기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고, 다면평가에서도 르미님이 꼴찌였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항상 그랬다. 항상 날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날 사정없이 까고 보내는구나. 그도 그럴 것이 난 이 임원의 전임 임원이 발탁해서 부서장이 된 터였고, 새로운 관리자는 HQ에 갔다가 온 나보다 경력이 훨씬 많은 분이다.
진짜 내가 잘 못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일을 안 했던 건 아닌데. 최소한 '수고했다. 이번에 새롭게 조직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라고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덜 아리지 않았을까 하는 푸념을 해본다. '뭐,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에게도, 나에게도.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조용히 옆 부서로 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일해야 할까. 다행히 면보직이 된 관리자 분들이 많아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진 않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있으면 책임도 덜고 더 편하게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불안했다.
이대로면, 이대로 10년 후면 어떻게 될까?
부랴부랴 타부서 친한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본다.
'형, 형네 팀에 자리 좀 있어?'
'왜? 너 옮기게? 너 거기서 잘 있었잖아?'
'그냥, 그렇게 됐어. 내가 가면 할 일 있을까?'
'일단 잠깐 보면서 얘기하자.'
어차피 친한 형이라 바로 말을 꺼낸다.
"형, 나 다른 사람한테 자리 밀렸어 ㅋㅋㅋ"
"그래, 어차피 그런 자리야. 나도 항상 그런 걱정을 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럼 어디로 가?"
"옆에 부서로 가라던데."
"갈 거야?"
"어차피 가도 배울 게 없을 것 같아서, 형네 부서로 가면 어떨까 해서."
"그렇지, 물론 니 전공이랑은 좀 차이가 있긴 해도 일 해온 짬바가 있으니 잘할 거야."
"형네 임원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물어보기 전엔 누가 알겠니. 지금 출장 중이시고 금요일에 귀국하시니까, 금요일에 메일 보내보는 게 어때? 이런 의향이 있는데 한번 뵙고 의견 여쭈어도 되냐고."
"그러게, 지금 한창 바쁘실 테고, 보내봤자 실제 뵙는 건 다음 주에 뵐 수 있으니 그게 낫겠다."
"르미야, 너무 침울해하지 마라. 이 회사에서 면보직은 흔하디 흔한 거다."
"나도 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이게 아녔으면 그 자리 지킨다고 눈치보며 계속 버텼어야 했으니까. 와이프도 옮기면 안되겠냐고, 이제 퇴근하는 죽상 얼굴 그만 보고 싶다고 하긴 했어."
"그래, 우리 팀에서 다시 보길 기다리마. 내 입장에서도 네가 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고마워 형. 형이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기운이 나네."
"그래, 힘내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형과 내년에 마라톤 뭐 나갈까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부서 전배 이야기라니. 그래도 회사를 오래 다녀 이런 인맥이라도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리로 돌아와, 팀원들 모르게 옮기려는 부서의 임원분에게 메일을 써보고, 문장을 복사해 GPT에 검토를 맡기고, 임시 저장을 눌렀다.
어차피 내일이면 전사 공지로 새로운 관리자가 공지되겠지만, 오늘은 그냥 주목받기 싫다. 내일이 되면 새로운 사람 덕분에 주목을 반만 받으면 될 테니까.
내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새로운 팀으로 자리를 어떻게 옮겨야 할지, 인수인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끝없는 걱정에 머리가 아파온다.
어차피 내일이 되어봐야 알겠지. 애써 모른 척 짐을 챙긴다. 아까 와이프에게는 대략 메시지로 상황을 알려줬지만, 집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긴 하지만 그래도 집이니까. 괜히 감정이 복받쳐 눈시울을 붉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막상 별거 아닌데. 월급도 별 차이 안 나고, 오히려 부담이 줄어 더 좋은 건데. 괜히 마음이 무겁다.
이번 인사 폭풍에서 난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었다.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