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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관리자에서 내려왔다.

(조직 개편 ep.2) 어떻게 하지

by 구르미


집으로 가려고 사무실 문을 나섰는데, 오늘따라 복도가 적막하다.

그 적막감에 애써 태연하려고 했는데, 암담했다.

덤덤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혀왔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라도 줬으면 어디로 옮기면 좋을까 고민도 해보고, 미리 연락도 해보고 조금 더 부드럽게 정리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간 이 회사에서 익히 겪었던 서프라이즈 인사에, 그리고 지금 임원분과 내 관계상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게 더 웃긴 상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난데, 마음 한 켠에 신경 쓰이는 건 부서원들이었다.

아직 발표가 안 났는데, 미리 말해야 할까?

업무 분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부서장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밥을 먹자니 함께 마주할 가족들 앞에 어두운 모습을 보일 것 같아 그냥 간단히 사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가야지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 조용히 구석에서 넷플릭스나 보면서 먹어야지 했는데, 민수님이 혼자 밥 먹는 걸 보았다. 민수님은, 안타깝게도 나처럼 이번 폭풍의 당사자이다. 민수님은 항상 열심히 해오던 분이었다. 나도 그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했고, 이번에도 좋은 평가가 나오길 바라며, 부서장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내가 올린 제안은 지금의 내 상황처럼 상무님에게 닿지 않았고, 진급 케이스였던 민수님은 안타깝게도 내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거기다가 업무 순환이라는 명목하에 다른 팀으로 이동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면보직이 확정되었을 때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잠시 후 민수님도 상무님과 면담 후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면담 후 풀이 죽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측은해졌다. 동병상련이랄까? 아니다. 민수님은 내가 면보직된 걸 모를 테니 민수님 기준으론 동병상련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민수님 앞에 앉아버렸다. 그리곤 멋쩍게 말을 꺼냈다.


"민수님, 오늘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죠? 평가랑 이동은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저도 뭐라 말을 드리기 어렵네요."

"어쩔 수 없죠. 올해 제 성과가 눈에 띄는 게 적었다고 하시니 별 수 있나요. 두 명 밖에 T/O가 없었다고 하던데, 거기에 전 들지 못했나 봅니다. 그나저나 인수인계는 어떻게 하죠? 바로 제 업무를 넘겨야 할 것 같은데."

"뭐 어떻게 되겠죠 (멋쩍은 웃음). 사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도 이제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어요."

"네? 상무님이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건 알았는데, 그 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사실 저희 팀이 하는 일이 많은데 상무님은 매번 성과로 보이는 걸 원하시고,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그냥 저흴 놓으신 것 같았어요.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됐군요."

"어쩔 수 없죠. 자신이 필요한 방향에 맞는 사람으로 구성하려는 건 임원으로서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상무님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부족했던 거죠. 그분께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한 거니." (가볍게 말하려고 했는데, 뭔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해버렸다.)

"그럼 새로운 관리자로 누가 오시기로 했나요?"

"아, 옆 팀에 그룹에서 오신 경력 출중하신 분 계시잖아요. 지훈 님이라고. 그분이 오실 거예요."

"결국 그분이 오시는군요. 그분의 백그라운드는 많이 들었어요. 회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저희 그룹 리드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그래도 많이 배울 수 있고 제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잘 들어주셔서 항상 감사했었습니다."

"그러게요. 회사 생활이 마음 같지 않죠.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저도 다시 현업으로 돌아가보려고요. 아, 이건 확정된 게 아니라 민수님만 알고 계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현업을 잘 아셨으니 그게 더 잘 맞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되시길 바랄게요."


갑자기 궁금했던 게 생각났다. 계속 머리를 돌던 그 질문. '내가 정말 나쁜 리더였을까?'


"고마워요. 민수님도 새로운 곳에서 더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상무님이 부서원들의 평가가 안 좋았다고 하던데 어차피 가는 마당인데 내가 진짜 별로인 리더였나요?"

"평가한 거 내용 못 보셨어요? 저도 그때 그 얘기 듣고 저희끼리 얘기했었는데 론 무기명이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맡 전 다 잘 써드렸을 것 같은데.. 근데 저도 그런 건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상무님이 우리 팀과 르미님을 안 좋게 평가하시고 티나는 일도 적게 주고 하시니까 저희도 그렇게 봐졌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괜히 우리도 그렇게 보이나 싶고. 그런 것 때문에 저희도 알게 모르게 르미님을 낮게 보고 불만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물론 나도 부족한 게 있었겠지만, 내 위에 상사가 중간관리자인 나를 대놓고 무시한다면, 그 중간관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을 잃게 마련이다. 이건 자기반성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괜히 나도 우리 팀원들을 그렇게 한 적은 없었나 떠올려 봤다.


"얼른 먹고 힘내고, 다시 돌아가서 남은 거 빨리 끝내고 집에 가시죠. 내일 또 어떻게 되겠죠!"

"그러게요. 이제 자리 이동도 해야 할 테니 적당히 마무리하고 가야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푸념처럼 이것저것 다 말해버렸다. 꼭 들어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괜히 민수님을 보니 나 때문에 민수님이 평가가 안 좋게 나온게 아닐지 마음이 쓰인다. 내가 더 잘했어야, 내가 더 임원분과 관계가 좋았어야 했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인수인계 문서를 작성해 본다. '인수인계'라고 검색해 보니 내가 관리자가 되었을 때 전임자에게 받았던 인수인계 문서가 나왔다. 그때는 참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인정받고 뭘 해도 재미가 있던 때가 있었는데.


그 파일을 기반으로 내용들을 수정하고 현재 부서원의 대략적인 전공과 경력, 특이사항. 주요 이슈, 개선 사항, 중점 관리 항목 등등을 적었다. 부서원들은 그때에 비해 경력이 늘었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늘었다. 그 당시 개선 항목들 중 일부는 내가 개선했고, 일부는 아직도 개선할 항목이다. 그렇게 2년 하고도 반이 지나갔구나.


내일 조직 개편 발표가 정식으로 나면 이 문서를 열고 새로운 부서장에게 인수인계를 해야겠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무능해서 밀린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또 임원은 다른 임원들에게 날 뭐라고 말할까? 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려나? 그럼 난 옮기자마자 무능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하게 되는 걸까?


괜한 쓸데없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저녁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온 후 유종의 미 비슷하게 임원이 퇴근하면 가려고 하다가 그래서 뭐 하냐 하는 생각에 PC를 끄고 소리소문 없이 집으로 향한다. 언젠가부터 임원은 내 퇴근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그때부터 이미 정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 무엇하겠나.


와이프에겐 메시지를 보내놨었기에 집에 가니 날 측은하게 바라보며 고생했다고 말해준다. 고마웠지만,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면 괜히 울컥할 것 같았고, 오늘은 좀 피곤하다며 술 먹고 늦은 시간에 집에 왔을 때 쓰는 야전 침대를 서재방 펴고 일찍 침대에 누었다. 술은 안 먹었지만, 머리는 몽롱했다.


마치 수능 전날처럼 머리에 온갖 생각이 떠 돌았다. 내일 출근하면 미리 팀원들에게 감사편지를 쓸까? 인수인계는 어떻게 할까? 일단 옆에 팀으로 이동하게 될 텐데, 계속 열심히 일하겠다고 의욕 있게 보일까, 그냥 안 건들이게 기운 빠진 모습을 보일까? 정신은 한없이 피곤했지만 몸은 잠을 자질 못했고, 정신은 날 더 힘들게 만들었다. 간신히 잠이 들고 눈을 떠보니 새벽 4시였다. 더 잠이 오지 않을 듯 해 평소처럼 가볍게 플랭크와 매트 운동을 잠깐 하고 새벽 6시, 회사로 나섰다.


새로운 시작이다. 눈치 보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다. 다시 해보자. 요즘 한창 핫한 드라마 속 김 부장처럼 방으로 발령된 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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