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 ep.3) 현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래 7시 반쯤에 출근하는데, 고작 한 시간 반 일찍 왔는데 이렇게 다르다니 신기하긴 했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 발송 창을 띄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어제 잠들면서 생각했던 수많은 생각 중에 하나였던 '작별 인사'? 같은 메일을 쓰기로 한 것이다.
편지는 매번 내 마음을 대변한다. 오히려 가벼운 편지는 그 가벼운 마음처럼 글도 가볍게 빠르게 써진다. 가볍기에 군더더기가 없고 핵심만, 써야 할 말만 간결하게 쓰고 논리도 명확하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무거운 편지는 잘 쓰고 싶은 부담과 쓰고 싶은 여러 내용들이 겹치면서 쓰다 지우다 수십 번 반복하게 된다. 한 문단 썼다가, '이건 좀 아니네.'하고 쓰던 글을 그대로 지우거나 엔터를 연타하고 새로운 문단을 쓴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평소에는 그렇게 크다 느껴지지 않았던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사무실의 고요와 공명하여 더 크게 들린다.
담백하게 쓰자, 날 변호하지 말자, 타인을 비방하지 말자, 쓰려던 목적인 감사와 인사에 집중하자. 그렇게 머릿속에 철칙을 되뇌며 한 시간여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다 썼다. 고작 한 화면 반. 이게 내가 2년 반 동안 아등바등했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짠했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굳이 감정 이입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팀원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어쩌면 이 메일이 여러분들의 관리자로서 보내는 마지막 메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오히려 여러분을 더 채근하고 제 의견을 더 반영하려 하지 않았나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 중략..
여러분들 한 분 한 분 모두 충분히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모두 열정적으로 따라와 주셨기에 덕분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동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충분히 빛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여러분들을 더 빛나게 돋보이게 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 일을 새로운 분에게 넘겨드리려고 합니다.
저 보다 더 경험 많고 높은 역량을 가진 분이시니 새로운 리더와 함께 더 좋은 성과를 내고, 더 즐거운 회사 생활을 하시길 빕니다.
부디 회사에서 더 빛나고, 더 행복한 분들이 되길 기원하고,
더 높은 곳에서 더 멋지게 만나 다시 일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구르미 드림.
그렇게 메일을 보내니 오전 7시가 되고 하나 둘 출근하고 한 시간 전 고요함은 흔한 금요일의 분주함으로 바뀌었다.
수신을 확인해 보니 어제 미리 말해준 민수님만 읽고 나머지는 읽지 않았다. 하나 둘 출근하고 메일을 읽었지만 굳이 그룹챗에 글이 올라오진 않았다. 사실 축하할 일도 아닌데 뭐라고 글을 쓰기도 애매했겠지. 아마 나만 없는 그룹챗에는 여러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헐 나간다니. 이제 앞으론 어떻게 될까? 더 나아질까 나빠질까? 안타깝다 혹은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귀가 간지러운걸 보니 내 욕도 하나보다 하며 속으로 웃었다.
적막함을 지나 나와 가장 오래 있었던 미희님이 놀란 얼굴로 말을 걸었다.
"헉, 저 몰랐어요. 진짜 가시는 거예요?"
"네, 그렇게 됐어요. 새로운 사람이 와야 조직도 더 활기가 생기는 법이잖아요."
"그래도 일하면서 정말 꼼꼼히 도움 주셔서 좋았는데, 간다고 하니까 너무 아쉽네요. 다음 달에 다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해요!"
"새로운 팀장님과 먼저 하셔야죠~ 그때 가능하면 초대해주세요!"
누구에게나 친절한 미희님 다웠다. 분명 예의상 한 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주니 고마웠다. 부서원 얼굴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갔다.
항상 예의 바랐던 미희님, 성과는 몰라도 의욕은 일등이었던 철수님, 항상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내가 하자는 것에 잘 따라줬던 민수님, 투덜 댔지만 자기 일은 꼭 기한 내에 끝내줬던 상철님, 그 외에도 한 명 한 명이 고마웠던 일들과 함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바로 뒤돌아보면 다들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큰일이다. 괜히 울컥해졌다. 한번 헛기침을 하고 자리를 떴다. 평소처럼 아침에 커피타임을 함께 하자고 할까도 했는데, 괜히 주목받을까 싶어 조용히 일어났다. 평소 보고서를 쓰며 스토리가 안 잡힐 때 걷던 기다란 복도가 오늘은 왠지 더 길어 보였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걷다 보니 메일이 하나 왔다.
'권한 변경 알림'
나 같은 중간관리자는 굳이 변경 공지가 올라오지 않는다. 유일한 공식적인 통보는 기존의 권한이 사라졌다는 알림과 사내 시스템에 접속했을 때 프로필 내 직책의 변경이다. 다행이다. 괜히 공지라도 뜨면 더 창피할 뻔했다.
이젠 정말 생존이다.
권한 변경 알림 메일을 보고 곧바로 임시저장함으로 가서 미리 작성해 뒀던 '부서 이동 관련 면담 신청' 메일의 발송을 눌렀다. 사실 더 고민해보려고 했다. 그 부서로 가는 게 맞을지. 남는 게 나을지, 혹은 또 다른 부서를 찾아보는 게 나을지. 하지만 이 애매한 상황을 더 끌기가 싫었다.
분명 나중에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혼란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과연 뭐라고 답이 올까. 설마 읽고 무시하진 않겠지? 순식간에 면보직 통보와 새로운 이동 제안을 보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문득 중학교 때 재밌게 봤었던 'Catch me, if you can.' 영화에서 디카프리오 아빠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단상에서 연설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생쥐 두 마리가 크림통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는 삶을 포기하고 익사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쥐가 크림 속에서 발버둥 치자 크림은 단단한 버터로 바뀌었고, 그 덕에 쥐는 나올 수 있었죠."
사실 디카프리오 아빠는 허세만 남은 볼품없는 중년 아저씨였고 그 생쥐는 살아남긴 했지만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 나도 지금 선택으로 내가 성공할 거란 자신은 없지만, 어떻게 되든 발버둥 치지 않으면 잘 나가는 걸 떠나서 내 생존이 위태해질지도 모른다.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유령이 될까?
애써 현실에서 도피하려 미리 작성해 둔 인수인계서를 출력해서 신임 관리자를 찾아갔다.
"축하드립니다. 저 보다 더 잘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었는데, 그냥 축하드린다고만 할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감사해요. 저도 어제 알았어요. 르미님이 잘해주셨었는데 제가 누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인수인계 관련해서 준비한 게 있어서요.
"아, 어쩌죠. 급하게 보고할 게 있어서.. 내일 오전 어떠세요?"
그렇지. 다들 나처럼 일이 한가한 건 아니겠지.
"아. 네. 바쁘시죠? 시간 날 때 자료 먼저 보시고 내일 자세한 내용 설명 드릴게요!"
태연하게 웃으며 답을 했다. 나야 뭐, 어느 순간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시간이 많다.
오후 5시.
어차피 관심에서 멀어졌고, 발표도 났으니 평소에는 꿈도 못 꿨던 칼퇴를 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 집에 가봤자 아이는 학원 가있고, 와이프도 다른 일정에 바쁠 테니 헬스장으로 향했다. 이럴 땐 생각의 스위치를 끄고 무작정 하염없이 달리는 게 최고다.
10km가량을 달리고 혼자 조용히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평소 일을 같이 하며 안면은 있지만 이 시간 전화는 왠지 어색한 수현 님이었다.
'왜 전화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