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 ep.4) 위기 속에 찾은 인연
"안녕하세요. 구르미 입니다. 수현 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업무 관련된 이야기시라면, 이번에 조직개편 되면서 제 업무가 바뀌어서요. 실무자에게 연락하시거나 이번에 부임하신 지훈 님에게 연락해 주세요."
"르미님, 저 퇴근 시간 이후에 전화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 관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됐나요? 저번에 마라톤 대회도 제안해주시고 해서 저희가 그래도 업무상으로만 인사하는 차가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아, 아셨어요?"
"어차피 저희랑 같이 일하는 게 많으시잖아요. 담당자에게 들었어요. 이제 다른 데로 가신다고."
"네, 그렇게 됐습니다. 어차피 기술하던 사람인데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저 지금 새로 생긴 노포집에 상훈이랑 같이 있는데, 여기로 오실래요?"
이 회사 와서 이런 제안은 10년 만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전 회사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호프집에 있으니 와서 딱 한잔만 하고 가란 전화가 왔었는데. 여긴 그런 게 없었다. 내심 편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적당한 거리 유지가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아, 오늘은 어려울 것 같네요. 다음에 제가 연락드릴게요.'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바로 답해버렸다.
"혹시 어디세요? 멀지 않으면 갈게요."
"아, 여기 ooo 아파트 옆에 에요"
자전거로 15분쯤 거리였다. 지난 주말까지 따뜻하더니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로 공기가 무척 차가웠고, 아까도 좀 무리해서 달려서 피곤하긴 했지만, 왠지 가고 싶었다.
"네, 바로 갈게요!"
와이프에게 회사 사람이 불러서 거기 들렀다가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당신이 회사에 친구가 있어?"
"헐, 날 히키코모리로 생각하는 거야? 나도 친구 있어!"
"혹시 긁? 어차피 나랑 민범이는 밀린 숙제 해야 하니까 잘 갔다 와. 날 추우니까 궁색 맞게 자전거 타지 말고 택시 타고 다녀와."
"됐어, 자전거 타는 게 더 편해 ㅎㅎ"
"으이그, 사서 고생한다. 괜히 객기 부리다가 감기 걸려서 아프다고 하면 거들떠도 안 볼 거다. 그리고 너무 늦게 들어오면 조용히 들어와서 서재에서 자라. 저번처럼 괜히 애랑 나 깨우지 말고."
"옛썰! 고마워 여보."
그러긴 했다. 회사에서 이렇게 부른 게 진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찬 바람을 뚫고 달리다가 귀가 떨어질 뻔했지만, 어찌 됐던 도착.
그 자리엔 일 때문에 몇 번 같이 만났었고, 헬스장에서 하는 그룹 운동 세션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상훈님도 있었다.
"르미님, 어서 오세요. 자전거 타고 오셨어요? 밖에 엄청 춥던데."
"원래 운동할 때 오던 코스라 걱정 안 하고 왔는데 정말 춥네요. 수현 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훈님 안녕하세요. 아, 그런데 두 분이 원래 친하셨었어요?"
"원래 친한 건 아니고 2년 전부터인가 우연한 기회에 친해지게 되었는데 비슷한 게 많더라고요. 그렇지 상훈아?"
"나 정도 되니까 너랑 놀아주지. 고마운지 알아라."
"수현 님은 동갑인 거 알고 있었고, 상훈님도 82에요?"
"네, 저도 82에요."
"이 회사는 젊은 사람만 많아서 우리는 거의 노인 취급인데,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좋네요. 그런데 어쩌다가 절 부르시게 된 거예요?"
"상훈이랑 같이 야근하다가, 새로 호프집 생긴 데에서 각 일병만 하기로 하고 왔는데, 어쩌다가 헬스장에서 하는 그룹 운동 이야기 나오다가 르미님이 엄청 열심히 하신다고. 겸사겸사 조직개편 얘기도 나와서 한번 부르면 좋겠다 싶어서 불러봤습니다. 저번에 마라톤 제안 해주신 게 고맙기도 했었고요."
"그러게요.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어차피 파란피가 아닌 이상 전 이 정도까지인 것 같아요."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랑 상훈이도 둘 다 보라피에요. 전 A사, 상훈이는 B사에서 왔어요. 르미님은 C사에서 오셨잖아요."
"와, 갑자기 동질감이 빡 오는데요? 괜히 존댓말로 계속하려니깐 오글 거리긴 하는데, 이참에 우리말 놓을까? 어차피 동갑이고 같은 처지이고 하니."
원래 말 놓자는 말 잘하지 않는데, 괜히 한 껏 텐션이 올라 말을 놓고 한참 동안 그동안 경력직으로 힘들었던 얘기, 회사에 대한 불만, 어떻게 여기에서 살아남을까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가까워졌고, 내일 출근을 해야 했기에 자리를 끝낼 시간이 왔다.
안주도 없이 원래 주량의 두 배는 마신 것 같다. 그동안 열심히 한 운동 덕분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간 어딘가 고랑에 빠져 골로 갈 것 같아서, 술도 깰 겸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르미야, 잘 가. 힘내고."
괜히 대학 친구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그냥 같은 과, 같은 고향이란 게 친구의 이유였고, 뭘 하든 다 재밌었는데..
한 동안 그런 인간관계를 잊었기에 말이 더 없어진 것 같다. 어차피 저 사람은 내 경쟁자아. 저 사람은 내 말에 겉으로만 공감하고 말 거야. 그렇게 치부하며 더 혼자가 되었었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마음을 트고 얘기할 친구를 찾았다. 비록 오늘 한 가지를 잃었지만, 더 큰 한 가지를 얻은 것 같다.
춥기도 했고, 숙취도 할 겸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꿀유자차를 하나 집었다. 안쪽 테이블에 앉아서 뚜껑을 돌리고 한 모금 하니 따끈하고 달콤한 게 너무 좋았다.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한 모금을 더 마시며 감정적이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나에게 올 업무 메일이 없단 걸 알지만, 습관적으로 회사 시스템에 접속해서 온 메일을 둘러봤다.
'RE: 부서 이동 관련 면담 신청'
갑자기 술이 확 깼다. 메일은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나도 모르게 메일을 눌렀다.
르미님, 저희 부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무척 좋습니다.
제가 출장 후 내일 복귀하는데요, 연락드리겠습니다.
'무척 좋습니다.'란 말에 갑자기 온몸의 긴장이 풀려버렸다. 서 있었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답장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고, 꼭 답장을 요청한 메일이 아니었으니 시스템을 닫고, 남은 꿀유자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내일 아침에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얼른 집에 가서 자야 했다. 갑자기 술이 다 깬 느낌이다.
혼자 설레발일지도 모르지만, 그간 꼬이기만 했던 매듭이 조금은 느슨해진 것 같았다. 술기운과 두근거림에 과연 잘 잘 수 있으려나 걱정하며 집에 도착해 양치를 하고 간이침대에 누었다.
며칠 전과 같은 자리인데, 오늘은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