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조직 개편 ep.6) 역시 꿈과 현실은 다르다

by 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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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인 태훈이와 성희와 함께 점심을 먹고 대학가를 걷고 있는데, 성희가 이런 제안을 했다.


"르미야, 너 우리 연극부에 한번 와보지 않을래?"

"웬 연극부? 나보고 연기하라고?"

"오늘 대사 맞춰야 하는데 상대역이 없어서, 와서 간단히 대사만 해줘."

"그럼 저녁에 삼쏘 네가 살래?"

"그래, 알겠으니까 한 번만 도와줘. 곧 공연날이라 연습이 필요해."


옆에서 태훈이 투덜 댔다.

"왜 나 말고 르미한테 부탁하는데?"

"넌 사투리가 심해서 몰입이 안돼."

"나 완전 표준어 잘하거든? 너 사람 차별하면 안 된다. 대신 나도 구경이라도 가고 삼쏘나 얻어먹어야지."

"넌 단어 보다도 억양이 문제야 ㅋㅋ 그래, 다 같이 가자."


내가 대사를 맞춰줘야 하는 역할은 루게릭병으로 몸이 점점 굳어져 가는 친구 역할이었다.

몸이 점점 굳어가서 꿈이었던 야구선수를 결국 포기하게 되고, 그걸 여자친구 역할인 성희가 위로해 주는 장면이었다.


몇 번 대사를 숙지해 보고 연습실에서 실제로 합을 맞춰봤다.

"그래, 다른 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을 거야. 선생님도 네가 다른 환자에 비해 진행이 느리다고 했잖아."

"다른 거? 내가 이거 말고 다른 걸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데.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아니야,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때?"

"괜히 착한 척 동정하지 마.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점점 몸이 굳어가는 게 어떤 건지 알아?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아냐고!!!!"

대사를 읽다 보니 내가 갑자기 너무 상황에 몰입해 버렸다.

절정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연극 속 주인공처럼 몸이 굳어가는 것 같았고, 난 더 절규하면서 목 놓아 소리 질렀다.

"난 정말 이렇게 살기 싫어, 싫다고!!!!!!"


아..... 꿈이었다.

잠결에 비명을 질렀다면 가족들을 다 깨울 뻔했는데 그러지는 않아 다행이다.

꽁꽁 둘러맨 이불 덕분인지, 꿈 덕분인지 머리엔 땀이 맺혔고,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갔다. 역시나 겨울이라 아직 밖은 어둡다. 그 어느 때보다 어둡다.


원래 이렇게 꿈을 잘 안 꾸는데. 어제저녁 늦게 마신 디카페인 커피 때문일까.


어제저녁, 평소처럼 퇴근하려는데 새로운 팀의 팀장님이 날 부르셨다.

어차피 내가 아직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일 얘기는 아닐 테고 아마 내가 얘기했었던 부서 이동과 관련해서 임원분과 논의된 결과를 공유해 주려는 듯했다. 집에 같이 가면서 얘기하자고 하셔서 그때 상무님이 면담에서도 옮기는 것에 대해서 열려있다고 하셨었으니, 난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기에 가는 길에서 이야기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말을 꺼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팀 지원님을 만났다.


"팀장님,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지원님도 일찍 가시네요? 요새 너무 일을 적게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지 못한 불청객(?) 덕분에 퇴근길에 이야기를 나누기는 글렀고, 때 아닌 누가 더 오래 일을 했냐에 관한 배틀 이야기를 듣다 보니 1층에 도착했다.


말할 때를 놓쳤기에, 팀장님은 커피 한잔 하며 이야기하자며 사내 카페로 이동했다.

오후 8시 53분, 마감을 7분 남기고 카페에 도착했기에 알바에게 미안해서 빠르게 주문했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작은 사이즈로 두 잔 이요."


곧 커피가 나왔고, 나와 팀장님은 카페를 나와 후미진 테이블에 앉았다. 이쯤 되면 느낌이 왔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자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란 걸. 하지만 애써 태연하게 물어봤다.


"그럼 전 언제 가면 되나요?"

"나도 보내주고 싶어, 그래서 상무님에게도 이야기를 드렸는데, 상무님은 부서원 숫자가 한 명 주는 건 안된다고 하셨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제가 가는 부서에서 한 명과 트레이드를 해야 옮길 수 있다고요? 그런 이동이 어디에 있어요? 절 면보직 시키실 땐 세상 쓸모없는 사람처럼 대하시더니 이건 너무 한데요. 필요가 없다고 하니 새로운 곳에 도전해 보겠다 하니 이제 와서 팀을 생각해 줘라? 그럼 전 뭐죠? 제 커리어는 뭐가 되는 거죠? 한 명을 확보하기 위한 그냥 인사상 숫자 한 명인 건가요?"

순간 격앙돼서 팀장님은 잘못이 없었는데 마음에 있던 소리를 쏟아냈다. 그나마 팀장님이 감사했던 건 아무런 반박을 안 하고 그냥 듣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번에 화를 내거나 내 말에 반박을 했겠지.


생각해 보면 잘 나간다는 그룹 출신은 항상 그랬다. 일을 하다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과가 바로 안 나오면 바로 이거 누가 했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일을 같이 못한다고 바로 담당자를 바꾸라고 한다. 그들에게 담당자는 그냥 체스판 위의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진만 가능한 폰(Pawn) 정도 되겠다. 그냥 아무 때나 버릴 수 있는, 잃어도 아무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는. 어차피 새로운 판이 시작되면 새로운 폰이 깔릴 테니까.


나 역시도 그랬다. 화려한 체스판에 올라설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난 그냥 버려졌다. 만약 기존 체스판에 있었다면, 나도 묵묵히 끝까지 전진해서 승격(Promotion)하여 다른 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크게 변화하기 위해 판을 바꿨다가 버려졌다.


회사에서 하던 일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큰 도전이다. 나도 큰 꿈을 안고 내가 잘할 거라 믿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 당시에는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던 아집도 한몫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옮기기 전 부서에서 나랑 비슷한 직급 친구들은 다들 그 부서에서 한 자리씩 담당했다. 괜히 그때 내 어리석음이 창피했다. 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냥 난 이렇게 가고 싶어도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가지 못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인 것인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그 사람들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을까? 아무리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회사라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한 명 한 명 다 소중한 사람인데, 왜 그 사람의 마음이나 그 사람의 미래는 생각해 주지 않는 걸까? 왜 그냥 당장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그들도 당해봐야 알까?


예를 들면, 보직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이렇게 말해줬다면.

'이번에 OOO 업무가 새로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르미님이 담당한다면 정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보직장은 그만두지만 큰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난 쫓기든 팀을 옮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자괴감이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해 보면 당사자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냥 그들에게 난 그럴 가치가 없는 서초에 살지 않는, 해외에서 대학 나오지 않은, 부모가 계열사 임원이 아닌 그냥 그런 쫄병인 것이다.


아마 이런 허탈감 때문에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또 어떻게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할까. 꿈을 깨고 나니 정말 현실이 앞에 왔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 건 아니지만, 한 때 잘 나간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번 일은 여러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이렇게 내가 속으로 손가락질하던 이름 없는 유령이 돼야 할까?'


부스럭 아이가 일어나 화장실 가는 소리가 들렸다. 표정을 다시 고쳐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우리 예쁜 아들 잘 잤어?"

그런데 아빠는 잘 못 잤어.


우울해하지 말자. 아무 일 없듯 세상 걱정 없는 표정 스위치를 켠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다. 지금 내겐 이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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