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 ep.7)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
참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던 조직 개편과, 그 이후 이어진 나의 발버둥이 있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안타깝게도 부서 T/O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시로 인해 나는 결국 날 면보직 시켰던 그 임원 산하에 계속 남게 되었다. 인정받지 못하는 부서에 남아 있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다.
과연 나에게 의미 있는, 중요한 일이 주어질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까,
난 과연 쓸모가 있는 사람으로 있을 수 있을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지내다 보니 선택지는 점점 단순해졌다.
1. 깽판을 치고 인사팀과 면담을 거쳐 부서를 옮기거나,
2. 아예 회사를 그만두거나,
3. 아니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조용히 회사를 다니는 것.
한창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아들은 점점 커가고, 이제 아플 일만 많은 우리 부부에게 무턱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르는 건 언감생심이다. 결국 기운 빠진 패잔병처럼, 사무실에 지박령이 되어 조용히 하루를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 만 해도 면보직 이후 부서를 옮기는 것이 꽤나 괜찮은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경력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 도전하고 싶은 의욕보다는 그저 나를 받아줄 곳을 찾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물론 옮긴 뒤 잘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꼭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과, 도피하듯 이동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그러던 중,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던 어느 날.
새로운 팀장님이 나에게 업무를 하나 주셨다. 다른 계열사에서 새로 오신 신규 임원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근무 시간 전, 짧은 시간을 쪼개 며칠간 이론 위주의 교육을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꽤 오래 굴러다닌 편이었기에 교육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새벽반 교육을 하고 마지막 날, 교육이 예상보다 조금 일찍 끝났다.
그때 그분이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르미님은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나요?”
순간 당황했다.
“네? 아… 일을 재미로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요? 하하. 상무님은 어떠세요?”
“전 지금까지도 재밌었고 앞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하고 싶어서 이 일을 선택했거든요. 르미님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에요?”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걸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절 교육시켜 준 보답으로, 다음엔 제가 진로 상담을 해드리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위해 숏텀·롱텀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정리해 보세요.”
조금 의외였다. 진급 교육에서나 나올 법한 미션을,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임원 분이 나에게 이런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도 놀랐다. 항상 업무만 생각했던 다른 임원 분들과는 달랐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어쩌다 보니 그 질문을 붙들고 일주일이 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부서 회식 자리에서 그 상무님을 다시 만났다.
“상무님, 아직 정리를 못 했습니다.”
“아,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이 없었나 보죠?”
“그건 아니고요. 나이가 들다 보니 생각이 많아져서요.
이번 주 안에는 찾아뵙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정리하는 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MBA 원서를 쓰는데, 학교에서도 똑같이 묻더군요.
인생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숏텀, 롱텀 계획.
그 학교에 가고 싶었으니까 정말 열심히 썼죠.
한 달은 그 고민만 했던 것 같아요.
신기한 건, 그때 세운 계획대로 지금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는 거예요.
르미님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을까. 무엇이 재미있었을까.
한참을 돌아본 끝에 떠오른 답은, 결국 원래 내가 하던 일이었다. 공정과 관련된 업무.
그게 가장 재미있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면보직 이후 다시 기존 부서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미 그 부서의 윗분들이 다 바뀌셔서 돌아갔을 때 잘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정치적인 판단, 실리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옵션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숏텀, 롱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를 끌어주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이전 부서로, 어떻게 다시 돌아갈 것인가.
답은 이해 당사자가 혹할 수 있는 ‘설득’이었다. 그 부서에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증명.
단순히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건 매력이 없다. 내 나이 또래는 어느 팀이나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 부서에 어떤 일이 필요한지 정리하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그 일을 내가 하겠다는 제안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료를 만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아, 그랬지. 나도 이렇게 신이 나서 일하던 사람이었지.'
어느덧 밤 11시.
인생의 목표와 계획을 정리하고, 출력까지 마친 뒤 컴퓨터를 껐다.
다음 날 새벽,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과연 어떤 답을 듣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