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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없는 '다면 평가'는 '인기투표'일뿐

무작정 실리콘 밸리 따라 하기는 그만

by 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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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 회사 동료 상철형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다가, 시즌이 시즌인지라 자연스럽게 ‘평가’ 이야기가 나왔다. 예전에 같이 일할 때만 해도 둘 다 사원 나부랭이에 불과해서, “올해는 어떻게 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까?”, “옆팀 팀장은 몇 년 연속 최고고과래.”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팀원들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위치가 되었다니..

“우리 진짜 늙었다.”며 서로 웃었다.

나는 회사를 옮겼지만, 상철님은 여전히 그 회사에 다닌다. 그래서 물었다.
“요즘도 팀장들끼리 비밀투표로 누구를 상위 고과 줄지 힘겨루기 해서 결정해요? 그때는 잘 나가는 팀장님 쪽이 고과 다 들고 갔었잖아요. 힘없는 팀장네는 아무리 잘해도 못 가져가고."


형님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회장님이 바뀌고 나서, 갑자기 실리콘밸리를 따라 한다면서 ‘다면평가’를 도입하겠다고 난리야.”

“그럼 형님도 부하직원들한테 평가받는 거예요?”
“그렇지. 이제 날 평가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생긴 셈이지.”
“우리 회사도 검토는 했었는데, 자칫 인기투표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보직자가 평가하는 걸 유지하고 있어요.”
“맞아. 아직은 예전 방식이 나은 것 같아. 다면 평가로 바뀐 후 애들이 말을 안 들어. 어차피 나 말고도 자기를 평가할 사람이 많으니 내 말 안 듣고 표 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단 거지. 마치 수능 끝난 고3 교실 같아."

"몇 번 해보면 인사팀이나 임원들도 깨달을 거예요. 아직은 아니란 걸.”
“인사팀보다 회장님이 먼저 깨달으셨으면 좋겠다.”

나도 처음 다면평가를 들었을 때에는 '진보된 제도'처럼 들렸다. 상명하복식 평가가 아니라, 상사·동료·부하 모두가 서로를 평가하는 방식이니까. 그런데 평가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어떻게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느냐가 큰 문제로 다가온다. 물론 다양한 잣대로 보는 것도 좋긴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기준은 있어야 하니까.


감정이 기준이 되는 순간


한 때 옆 팀에서는 회사의 평가 기준과 별개로 다면 평가를 자체적으로 도입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면 평가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나도 관심이 있던 터라 옆 팀에서 일하던 지현 님에게 물어봤다.

"지현 님, 올해는 그쪽 팀 다면 평가 안 해요?"

"아, 작년에 좀 일이 있었어서, 올해부터 예전처럼 돌아가기로 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좀 알려주시면 안돼요? ㅎㅎ"

"음, 커피 한잔 사주시면 제가 슬쩍 알려드릴게요~"


금요일 오후, 다행히 업무가 대부분 마무리되었고, 사장님도 출장이시기에 가벼운 마음에 커피 한잔과 함께 도파민을 기대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략 내용은 이랬다.


미영 님과 철용 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철용 님은 미영 님 보다 입사가 2년 빨랐지만, 나이는 미영 님이 2살 더 많았다. 미영 님은 대학원에서 석박 통합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면서 학사임에도 입사가 늦어진 것이다. 입사 초기, 그런 미영 님에게 업무를 알려주면서 철용 님이 미영 님의 실험실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신입처럼 알려주면서 미영 님의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때 이후, 철용 님과 미영 님은 서로 없는 사람처럼 지냈으며 몇 번의 팀장님의 노력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사자들도 당사자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참 힘들었다.


그러다가 다면 평가를 시도해 보기로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팀 내에서도 여러 활동을 하는 미영 님은, '니가 감히 날 무시해? 이번에 한번 당해봐라.'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발휘해 팀원들에게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훈 님, 저 철용 님 너무한 거 같지 않아요? 사람들 무시하는 게 좀 심한 것 같아요."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저한테 그때 했던 거 기억하시죠? 이게 저에게만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어차피 무기명이니까 이번에 평가할 때… 저 좀 생각해 주세요.”


작은 씨앗은 심어졌다.
그리고 사람의 인식은 참 무섭다. 한 번 부정적 이미지가 자리 잡으면, 괜히 나쁜 모습만 더 크게 보인다.
게다가 ‘익명’이라는 조미료가 더해지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손쉽게 낮은 점수를 매긴다.

더 문제는 다면 평가 자체가 팀장님과 면담 시 잘한 사람 2명과 못한 사람 2명을 이유 없이 뽑으라고 했었기 때문에 이름만 다면평가지, 사실상 ‘인기투표’에 불과하다. 결국 누가 더 친절했는지, 누가 말을 잘 섞었는지가 평가의 변수가 됐었다고 한다.


개인 면담을 하면서 상세한 이유를 물었지만 다들 상세한 이유를 대지 못했고, 명단을 취합해 봤지만 팀장님이 생각하는 것과 큰 괴리가 있어서, 준비가 부족했단 것을 깨닫고 다면 평가는 중단되었다고 한다.


진짜 다면평가는 ‘피드백 문화’에서 출발한다


인사팀에서 주관했던 평가 관련 교육을 시작하면서 영상 클립을 하나 보여준 적이 있었다.

구글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주인공이었고, 구글에서는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에 대해 나온 내용이었는데, 흥미로워서 다시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https://youtu.be/7akDyl3rlTs?si=PT4O32vo0NAGd_xC


기억나는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피드백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김은주 자기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만약 내가 함께 일하는 동료의 성과가 좋지 않다면, 그건 나의 피드백이 부족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동료가 실수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면담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요.
그래도 개선되지 않으면 또 피드백을 주죠.
그런 과정을 충분히 거쳤을 때 비로소 낮은 평가를 줄 수 있어요.
결국 평가는 ‘너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거든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예전에 들었던 상사의 말을 떠올렸다.
“영희 님 성과가 안 좋아 보이니까 하위 평가를 주세요. 누군가 꼭 하위 평가를 줘야 합니다.”

그때 나는 잠시 멈췄다.
‘내가 그에게 제대로 피드백을 주었나?’
‘혹시 나의 무관심이 그를 낙오자로 만든 건 아닐까?’


관리자로서 누군가에게 낮은 평가를 준다는 게, 단순히 내 평가권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잘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 평가는 내가 주지만, 나도 그 평가 때문에 다면 평가를 받는 느낌이었다.


낮은 평가는 나에게도 큰 질책처럼 느껴졌다. 난 충분히 내 역할을 했는가.


다면 평가가 아닌 다면 피드백, ‘함께 나아가자는 약속’


좋은 평가는 평가 대상자를 정말 잘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팀원들을 평가할 때도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장점과 성과를 잘 파악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지 정말 많은 고민을 한다. 단순히 성과로 판단해야 할까, 그 사람의 노력 등 근면 성실함을 반영해야 할까, 미래 성장 가능성을 반영해야 할까.


그런 고민 없이 단순히 일하기 편한 사람, 일하기 싫은 사람을 뽑는 다면 평가는 오히려 조직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십상이다. 결국 다면 평가를 위해선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고 더 많은 피드백을 주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 그렇게 혼자가 아닌 조직으로 함께 나아갈 때 다면 평가는 더 의미가 있게 될 것이고 조직은 더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 조직에서도 이런 문화가 자리 잡길 바란다.
“누굴 평가해야 하지?”가 아니라
“누구와 더 성장할 수 있을까?”로 질문이 바뀌는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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