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 회의적이지 않게 하기
예전 부서에서는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고객사와 같이 논의하는 게 많았고, 내 일은 내가 책임지면 됐다. 가끔 늦게 출근해도 일을 펑크 내지 않았으면 됐고, 일이 많으면 혼자 조용히 사무실에서 야근을 했다. 사실 그게 편했다. 같이 일하지만 문제가 없는 한 서로 신경 쓰지 않는 삶. 물론 가끔 내 관리자에게 경과는 보고해야 했지만, 나름 나도 고인물 이었기에 관리자도 날 믿어줬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팀원당 여러 투자를 검토하고 있었고, 난 그 모든 투자를 동일한 톤으로 조율해야 했고 그래서 팀원끼리의 톤 조정이 필수였다. 그래서 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회의를 안 한다면 팀원들을 개별로 만나서 진행상황을 듣고 방향을 조율하고, 그 내용을 다른 팀원을 만나 앞 팀원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톤을 조율하고....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회의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내 트라우마를 팀원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라디오 코너 느낌으로 회의 속에 작은 코너를 만들었다. 한 달에 한번 하는 코너도 있고, 격주마다 하는 코너도 있다. 내가 하는 코너도 있고, 팀원들이 하는 코너도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코너를 나열해 보면,
회의 처음에 10분 정도 진행하고, 매주 팀원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일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매번 나만 말하는 것 같아서 시작해 봤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았다. 팀원들은 투자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하고, 다녀온 여행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맛있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소개하기도 했다. 가볍게 이야기한 후 딱딱한 부서회의를 하면 그나마 조금 덜 딱딱한 분위기로 회의할 수 있어서 성공한 코너다.
우리 부서는 나 빼고 전부 상경계열이고, 현장이나 기술 관련 경험이 없다. 물론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입는다란 말처럼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자세히 뭐가 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 발생했던 공정 이슈들에 대해서 왜 그런 이슈가 발생했고, 얼마나 큰 문제이고,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고, 그를 위해 어떤 투자가 예상되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이 코너도 다들 학구적인 눈빛으로 신기해하며 여러 질문도 하고 배우는 시간이라 만족도가 높다. 별도로 이론 공부와 병행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어렵고, 과학 예능 느낌으로 진행하고 있다.
각 담당자마다 여러 투자를 심의하고 각자 검토 시 많은 고민을 하고 담당 부서와 긴 논의를 진행한다. 그런데 우리는 팀이다. 즉, 사람은 다르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검토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특정 투자를 하나 선정해서 다 같이 띄워놓고 이것은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case study를 한다. 이건 논의할 만한 안건이 있을 때만 진행하는데, 다들 개인의 경험과 관점을 토대로 많은 논쟁을 한다. 난 여기에서 질문을 던지고, 예를 들면, "본 투자비가 적정한지 어떻게 판단할까요?" 이렇게 질문하고, 팀원들은 각자 생각을 말한다. 각자의 이해도도 판단하기 좋고, 한 방향으로 조율하기 위해 좋은 시간이다.
이런 비정기적인 코너가 끝나면 실제 회의가 시작된다. 실제회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업무 업데이트. 처음에는 각자 돌아가며 자기가 무슨 검토를 하고 있고, 검토 중에 이슈들을 이야기했는데, 구조가 없다 보니 간혹 말이 길어지거나, 누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엑셀 형식으로 표를 만들고 거기에 내용을 기입하도록 했다. 이 엑셀은 나중에 통계에 용이하도록 서술형이 아니라 선택형으로 작성할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부서의 투자이고, 어떤 유형(유지보수, 신규, 법규 준수 등)인지, 기존 이력이 있는지, 투자금은 얼마인지, 긴급인지 등등..
이렇게 하면 이미 회의 때 말할 내용이 다 표에 있기 때문에 내용만 잘 작성해 뒀다면 회의 때 버벅거릴 이유가 없다. 표의 내용 중 강조할 만한 사항만 말하면 된다. 그리고 이 내용 기반으로 그대로 주간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다. 한 번씩 빠진 내용이나 업데이트 안된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고 변경해 주면 끝이다.
사실 회의가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회의는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듣는 지루한 시간이니까. 그래서 기존에 길었던 개별 업무 보고를 표 형태로 사전에 입력하는 것으로 줄인 것이다. 그 줄인 시간에 여러 도움이 될만한, 부서원 간 관계를 도모할만한 시간을 넣은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기 전과 후 모두 회의 시간은 한 시간을 넘지 않았다. 오히려 개별 보고를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하느라 걸렸던 시간이 많이 줄었고, 혹시나 담당자가 누락해서 나도 누락하는 경우도 많이 줄었다.
지루한 회의일 수 있지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회의의 host가 준비한다면 회의도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게 나 혼자 생각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있다. 뭐가 됐든 회의라는 걸 싫어하는 Z세대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회의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불안감을 원동력 삼아 계속 더 좋은 방향을 고민해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