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외계인인가?
예전에 외국 고객과 상대하는 업무로 변경된 후 한창 이것저것 외국인과 대화에 도움 될 만한 공부를 했었다. 일하랴 애랑 놀아주랴 고정적인 시간 내기 어려웠던 나에게 출퇴근 시간에 듣는 굿모닝 팝스는 꽤 쓸모 있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 안타깝게도 굿모닝팝스는 2024년 6월에 종방함 -
제일 좋아했던 코너는 팝송을 듣고 그 가사를 해석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노래는 다 잊었지만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었다. 바로 스팅(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 구글링을 해보니 벌써 6년(2019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 후렴구는 머릿속에 생생하다.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I'm an Englishman in New York.'
추억을 되살려 전체 가사를 다시 읽어봤다 (편의상 번역본 확인)
저는 커피를 마시진 않습니다, 차를 마시죠.
토스트는 한쪽만 구운 것을 선호한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할 때 억양에서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뉴욕에 사는 영국인이란 걸요.
5번가에서 걷는 저를 보시면 지팡이가 제 옆에 있을 겁니다. 발이 닫는 곳마다 어디든 가지고 다니죠.
저는 뉴욕에 사는 영국인이니까요.
원래는 후렴을 제외한 가사는 딱히 와닿지 않았는데, 파트장이 되고 한 달쯤 지나니 이 가사가 너무 내 이야기 같다.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미 이 회사를 다니면서 자주 겪던 일이니까. 난 그래도 생각이 젊으니까 하고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근데 더 큰 간극은 문과와 이과의 차이였다. 난 공대생이고 파트원들은 모두 상경대생이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지우: 파트장님, 파트장님은 체중 조절 어떻게 하세요?
나: 체중이 주는 건 엔트로피에 역행하는 거라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있어요
지우: 네? 엔트로피요?
나: 아 네, 열역학 제3법칙에 나오는 무질서도요.
지우: 아, 저 그거 안 배웠는데.. 문송합니다 ㅠㅠ
나: 아하, 제 드립이 실패했네요 ㅎㅎ;;
뭔가 미심쩍어서 나중에 찾아보니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이었다. 만약 전에 있던 팀에선 이걸 말했다면 "아, 그거 열역학 제2법칙 아녜요? 3법칙은 절대 0도인 -273도 말하는 그거잖아요"라고 누군가 말했을 거고 다들 호기심 어리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했을 것이다. 이번 상황은 2002 월드컵을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다 같이 봤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난 군대에서 봤다)
물론 반대 상황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다 엑셀의 신인지, 엑셀 할 때면 손이 안 보인다. 뭔 필터를 걸었다가 수식을 걸었다 복사를 했다가 왜 자꾸 한 행 전체 고르기를 했다 풀었다 하는지.. 보다 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다들 재무와 세무 관련된 지식에 빠삭했다. 이게 경비인지 투자인지, 이게 감가상각이 몇 년인지, 이게 잔존 가치가 얼마인지... 그럴 때 난 속으로 '이송합니다.' 하며 애써 알아듣는 척 있었다. 당당하게 모른다고 했어야 했는데, 왜 그랬나 싶다. 파트장이라고 가오는 잡고 싶었던 것인지..
어찌 됐던, 발령 이후 같은 사무실이지만 다른 파티션으로 첫 출근을 하고, 지나가며 보긴 봤지만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았던 (오래 다녀서 여간하면 팀마다 아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여긴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지...?) 파트원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고 친해지려고 했지만, 하필 이럴 때 내 질병이 발현한다.
한 번만 들으면 이름을 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난 이름 외우기는 젬병이다. 머릿속에 몇 번을 되뇌고 심지어 적어도 보지만 무슨 일이 생겨 누군가 불러야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재빠르게 명찰을 보고 못 본 척 이름을 말한다.
물론 더 민망할 때도 있었다.
나: 네, 여기에는 이거 넣고요, 저기에는 작년에 했던 그 보고서 내용을 요약해서 넣읍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표를 앞에 표 형식으로 넣도록 하죠. (워드에 쓱싹쓱싹 내용을 붙여 넣는다.)
지석: 네, 파트장님. 그럼 이 파일 저에게 보내주시면 마무리하겠습니다.
나: 네, 지금 보낼게요. (이메일 창을 열고 수신인 칸에서 멈춤)
(정적) (정적) (정적)
나: 아, 잠깐만요. 내가 이따가 다른 거 추가해서 보내줄게요.
맞다. 이름을 까먹어서 수신인에 이름을 못 적었다. 문제는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또 발생한다. 저번에는 파트원이 직접 이름을 말해준 적도 있다. '.. 아,,, 쪽팔려...'
심지어 같이 일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도 요즘도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날 때가 있는 거 보면 혹시나 무슨 질환인가도 싶다가 대학생 때도 똑같이 그랬었어서 '나도 참 한결같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만다.
그렇게 약속했던 전임 파트장과 한 달간의 인수인계가 끝났고, 그래도 파트원 친구들이 의리가 있어서 인지 (일이 힘들면 구성원끼리는 뭉치게 되어 있다. 마치 전방부대의 내무반 분위기가 좋은 것처럼) 점심도 같이 먹어주고, 말도 걸어준다. 그렇지만 뭔가 어색한 사이는 아직도 그대로다. 어쩌지,, 어떻게 친해져야 할까?
문득 이런 고민을 했다. 난 어떤 리더가 되어야 할까? 엄근진(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리더가 되어야 할까? 친구처럼 편안한 리더가 되어야 할까? 엄근진이면 약간 거리를 두는 게 적절했고, 친근한 리더는 거리를 가까이하는 게 맞았다. 근데 이 고민은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이미 비슷한 고민을 해봤고, 결과를 깨달았으니.
아들이 태어나고 아들램이 말을 하기 시작할 때 근엄한 아빠가 될지, 친구 같은 아빠가 될지 고민했다. 처음 선택은 근엄한 아빠였다. 뭔가 위엄 있는 아빠의 모습이 멋져 보였으니까. 하지만, 내 성향상 엄근진이 불가능 하단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 앞에선 자연스럽게 웃게 되고 뭐라도 말을 더 걸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사람들 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게 안 됐고, 내 파트 친구들에게도 엄근진은 불가능했다.
엄근진은 불가능했지만,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실없고 알맹이 없는 그런 사람은 내가 딱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성향상 오디오가 비면 어색해서 그걸 채우려고 쓸데없는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 최대한 자제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다 의도적으로 질문을 많이 했다. "주말에 뭐해요?/뭐 했어요?", "요즘 나온 넷플릭스 OOO 봤어요?", "오늘 점심에 어떤 메뉴 고를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질문을 하고 꼭 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내 생각엔 이게 관계 형성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허구한 날 주말에 뭐 했냐, 뭐 보냐 물어볼 순 없고 그렇게 하다간 이 사람 형식적으로 질문하네 란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딱 내가 싫어하는 '질문하고 안 듣고 자기 얘기하는 사람'. 내가 겪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이랬다.
속빈: 르미님, 이번 주말에 뭐해요?
나: 아 네, 이번 주에 OO에 있는 카페 가서 책 볼까 해요
속빈: 아 그래요, 저는 △△에 있는 펜션 갈 건데요, 거기가 엄청 핫하더라고요. 이거 사진 한번 볼래요? 엄청나죠? 그리고 여기가 제가 아는 분이 운영하시는데 절 초대해서 엄청 비싼 와인을.... (10분 동안 자랑)
그래서 이런 사람이 안되려면 꼭 대답을 잘 듣고 기억하고, 다시 한번 이어지는 질문을 해야 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꾹 참고. 그리고 꼭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물어봐야 한다. "저번주에 갔던 곳은 어땠어요?" 이런 게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왜냐? 나도 누가 이렇게 관심 가져 주면 좋으니까.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등가교환이다.
그렇게 질문하기, 내 얘기 참기, 잘 듣기, 잘 기억하기, 다시 질문하기를 이어가다 보니 그래도 어색함은 좀 사라졌다. 그렇지만 남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게 알맹이 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