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내 직장생활에 찾아온 위기
남중-남고-공대를 나와 제조업 회사에 취업하여 15년간 엔지니어로 살아왔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군대를 다녀왔지만, 대학생활과 군대의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그리고 취업하고도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새로운 가정을 하고 실험으로 검증하고 결과를 내놓으면 됐다.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내 탓이었고, 내가 야근하거나 주말을 반납하면 됐다. 지극히 공대스러운 일상. 내가 취업하고 대학 선배와 술자리를 가질 때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굳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니 맘대로 하지 말고,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착 붙어 있어. 그게 제일 좋더라." 그리 존경하는 선배는 아니었지만, 지난 15년은 젖은 낙엽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이 모든 카오스의 시작인 그 분과 카오스에 쐐기를 박았던 그다음분을 만나기 전까진..
잘 나가는 회사에서 이직한 새로운 상무님은 꿈이 많았다. 조용히 잘 살던 나에게 그분이 이런 말을 던졌다.
"전략팀에서 우수 인력 한 명 파견을 원하던데, 르미님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나도 전 회사에서 계속 엔지니어였다가 비슷하게 전략 업무를 했었는데 시야를 넓히는데 참 좋았어요. 딱 1년만 하고 돌아와요."
잘 나가던 분이었고, 고작 1년인데 뭐. 마침 일이 지루하던 차에 괜찮은 옵션이라 생각했다. 고과를 잘 챙겨줄 것이라는 말도 솔깃했다. 잠깐 생각해 본다 말했고, 이틀 후 난 대답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1년만 다녀오겠습니다. 저 다시 받아주시는 거죠?"
난 몰랐다. 그게 그 분과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임원이 임시직원의 약자라는 말처럼 뜻하지 않았던 기류 변화로 촉망받던 그분은 갑작스럽게 집에 가셨고, 난 돌아갈 곳을 잃었다. 왜냐면 나랑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분이 그 자리로 오셨으니까..
상무님,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저 이제 어떻게 하죠? 혼자 허공에 푸념하며 쓰디쓴 커피를 들이켰다.
다행히 새로운 업무는 나쁘지 않았다. 회사에서 발생한 문제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 것인지 분석하기도 하고, 경쟁사의 기술이 어느 정도 인지 평가하기도 했다. 나름 기술자로 오래 일을 해서 인지 내부 문제나 외부 기술을 평가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덕분에 나름 중요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대신 보고서를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연히 좋고, 당연히 나쁜 건데 보고서를 보는 사람은 기술을 보던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공대를 나온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한 설명이 필요했고, 모든 좋고 나쁨이 숫자로 표현되어야 했다. 다행히 팀 내에 상경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아 도움을 받기가 어렵진 않았다. 대신 왜 파견을 요청했는지는 2주 만에 파악이 가능했다. 야근 지옥... 낮엔 주간에 있을 보고를 위해 바쁘고, 밤엔 주간에 있었던 보고에서 나온 지시사항을 하느라 바빴고, 주말엔 해결하지 못한 지시사항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1년만 버티자. 1년 후엔 팀을 나가던, 회사를 나가던 하리라.
그래도 어떻게 버티다 보니 1년이 지나갔다. 1년 동안 원래 하던 사내 이슈 분석, 경쟁사 분석뿐 아니라 신규 사업 검토, M&A 대상 가치 평가, 임원 평가까지 수행했다. 완벽히 전문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많이 배우고 내 역량을 늘릴 수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졸업하자.라고 생각하고 팀장님에게 말했다. "팀장님, 이제 저 좀 살려주세요. 이제 졸업시켜 주세요."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는데, 팀장님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어? 몰랐어요? 르미님 파견이 아니라 전배예요. 그래서 원복은 불가능합니다. 잘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수고해 주세요 ^^"
사실 팀장님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분이긴 했다. 연구원 출신임에도 발탁으로 회사의 전략을 세우는 이 팀의 팀장까지 하신다. 매우 젊은 나이에 상무가 되시기도 했다. 근데,, 아무리 내가 갈 곳을 잃긴 했지만 (물론 팀장님은 전 팀 팀장과 내 관계를 잘 모르긴 한다) 그래도 고민은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도 저 올 때 1년만 고생해 달라고 하셨던 게 기억나거든요?!
팀장님께 졸업을 언급한 이후 이상하게 팀장님이 나에게 잘해준다. 명절이라고 선물을 보내주시더니, 뜬금없이 와인 한잔 하자며 불러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뭐지? 이대로 날 끝까지 부려먹으시려는 것인가? 이 궁금증의 답을 찾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목요일 오후 4시, 인사팀의 친한 동기에게 메신저가 왔다.
인만(인사팀 동기, 인사가 만사라 매번 우긴다.): 르미야, 너 인사발령 떴던데?
나: ㅇㅇ? 나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인만: 아니, 너 투자파트로 가던데? 그것도 파트장으로
나: 뭐? 그게 뭔 소리야? 거기 파트장 있잖아
인만: 그분 힘들다고 퇴사하신데
나: 헐, 뭐냐. 언제 발령인데?
인만: 내일 아침에 공지 나갈 거고, 다음 주 월요일 발령이야.
나: 그거 누가 결정한 거야?
인만: 이건 너네 팀장이 정하는 거야
나: 망할 놈의 거미인간!!! ※운동 부족으로 팀장님은 배만 나오고 팔다리는 얇은 거미로 진화 중이다.
바로 팀장님에게 전화했다.
나: 팀장님, 저 투자로 가야 해요?
거미: 아 내가 말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축하해요 구파트장.
나: 저 투자 모르는데요? 잊으셨을지 모르시지만 저 공대생이에요!!
거미: 아, 나도 공대생이에요 ㅋㅋ 잘할 거라 믿어요. 아, 미안 지금 사장님 전화가 와서. 내일 이야기합시다~ (뚜뚜뚜~)
그렇게 금요일도 팀장님은 바빠서 따로 만나지 못했고, 난 그다음 주 월요일 투자 파트의 파트장이 되었다.
뭔가 망한 기분이 든다. 내가 투자를 해본게 없는데 날 파트장으로 올리면 어쩌란거지? 뭔가 잘못되고 있다. 축하한다며 나보고 퇴사하라고 돌려 말하는 건가?식어버린 이제 따뜻하지 않은 오늘의 커피를 들이킨다. 왠지 오늘은 더 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