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습관은 생각보다 더 쉽게 전염된다
비록 시도했던 투자 효과 산정은 실패했지만, 4개월 정도 지나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 부서는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같다. 다행히 예전 팀에서 봤었던 '나잘난'은 별로 없었고, 부서원들은 다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나도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기반으로 가급적 한 명 한 명에게 투자 검토 시 유용한 insight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잘 풀릴 거라 생각했던 우리 파트에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문제가 발생했다.
2년 차 사원인 지우 님은 연차상 팀 내 가장 막내였지만, 막내답지 않게 언제나 책임감 있게 일을 해줘서 항상 고맙고, 덕분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내년에는 가능하다면 평가를 높게 줘서 조기 진급 대상으로 올려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직 다른 파트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아침에 지우 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우 : 팀장님, 혹시 커피 한잔 하실래요?
나 : 나야 좋지요~ 혹시나 할 얘기가 있다면 좋은 얘기면 좋겠네요~
직장생활을 한 지 15년이 넘었다. 보통 이렇게 보직장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것은 좋은 이야기 보단 안 좋은 이야기가 많다. 특히 생산에 있을 때 그런 경우가 많았다. 여러 유형 중 몇 가지를 더듬어 보면,
1. '선생님 쟤 혼내주세요' 형
"저 OO랑 같이 일 못하겠어요. 저를 다른 팀으로 보내던, OO를 다른 팀으로 보내던 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일 더 못할 것 같습니다"
성별을 한정하고 싶진 않지만 보통 젊은 여자애들끼리 이런 경우가 많다. 처음엔 엄청 고민했지만, 그렇게 울고불고 싸우던 애들이 어느 순간 둘이 손잡고 웃으며 밥 먹으러 가는 걸 보고 여간하면 크게 반응하지 않는 유형. 주의해야 할 점은 절대 어느 한 명을 편 들어선 안된다. "아,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네. 바로 뭘 할 순 없는데, 나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보고 알려줄게." 정도가 적절한 대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형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이럴 경우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한 가지는 이직할 곳을 다 정해놓고 통보하는 경우. 이럴 땐 딱히 답이 없다. 그냥 보내줘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노답형. 어디 정해둔 데는 있니? 하고 물어보면 회사를 그만두고 준비한단다. 내 입장에선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말이 딱 떠오른다.
3. '너무 힘듭니다. 다른 데로 보내주세요' 형
이름하여 '꿀빨러' 들이다. 교대하기 싫어요. 힘든 일 하기 싫어요..
근데 그렇다고 다 들어줄 순 없다. 일단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고 들어준 적은 없었다.
4. '급한 일이 생겨서 한 달만' 형
코인이나 도박 등으로 힘들어진 친구가 한 달만 빌려달라는 요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 먼저 제보가 들어오고 돌고 돌다 나에게 까지 온다. 뭐 때문에 돈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간하면 이제 포기해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나도 애 키우고 하려면 힘들다. 미안하다. 할 수밖에 없다.
5. '수금'형
결혼이 축하할 만한 일이라 이렇게 연락 오는 건 반갑다. 근데 친하지 않으면 청첩장 돌릴 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 사람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라, '축하해요~ 예식장에서 봐요~' 정도로 마무리한다.
역시나 지우 님의 경우는 회사를 나간다는 얘기였고, 안타깝게도 노답형이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제안했다.
"지우 님, 회사에서 이직 준비해도 되니 이직은 확정하고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런데도 지우 님은 완강했다. 자기 전공이 아닌 곳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전공으로 옮기지 못하느니 과감하게 결정하겠단 것이었다. 막을 수 없었고, 결국 그녀는 떠났다.
한동안 한 명 부족한 상태로 지내다가 드디어 다른 부서에서 전배가 왔다. 현장 경험도 있고, 일머리도 똑똑해 보였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늦게 오는 거..
회사가 자율출퇴근제 이긴 한데, 10시에 올 때도 있고, 11시에 올 때도 있었다. 일부러 회의를 일찍 잡아보기도 했는데, 매번 아침에 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게 전염된다는 것이다. 한 명이 그러니 다들 출근 시간은 늦어졌고, 다들 9시 반쯤 되어야 출근을 했다. 그런데 하필 우리 팀의 자리는 부사장님이 지나가시는 자리라....
어느 날 부사장님께서, "투자팀은 다들 아침에 외근이 있나?"라며 겸연쩍게 보시고 가셨다.
어쩔 수 없다. 뭔가를 해야 했다.
먼저 평가로 위협해 봤다.
늦게 오면 연말에 평가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다들 평가는 신경을 안 쓰는지 진짜 아예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쓴 방법은, 동정심이었는데..
그래도 이건 조금은 효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쓴 방법은, 반성문 방법이었는데,
9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9시가 넘으면 왜 늦었는지 개인 메시지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2번과 3번을 같이 쓰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잘 지켜지는 것 같다.
사실 아침 일찍 와야 조식도 먹고 오전도 더 알차게 보내고 하는데,
이런 거 말해봤자 꼰대 인증만 되는 꼴이니.. 일단 계속 잘 지켜지길 기원할 수밖에.
어쩔 수 없는 끼인세대의 고충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