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와 경력, 보이지 않는 벽
"르미 팀장, 구매팀에서 경철 과장이 투자로 올 테니 잘 챙겨줘."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난 딱히 인력 충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굳이..? 그리고 여간하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누구지? 그리고 왜 오는 거지?
알고 보니 경철 과장은 나보다 다섯 살 나이가 많은 분이셨고, 5년 전에 경력으로 설비팀으로 입사하셨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 이후 구매팀에서 1년간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반가운 충원은 아니었다. 나도 에이스를 받고 싶은데, 분리수거소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그렇다고 그 사람을 자를 수도 없는 것이고, 전혀 생뚱맞은 부서로 보낼 수도 없는 거니 이해는 됐다.
구매팀은 공채의 힘이 강하기로 유명한 부서였고, 팀장 포함 대부분 조직원들이 공채였다. 그들은 형 동생 하며 카르텔을 형성했고, 타 부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공채면서 유대관계가 좋은 사람이 구매 신청하면 프리 패스였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면 복잡한 질문과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런 곳에 경력직이라니.. 사실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문득 조선시대의 양반과 평민이 생각났다. 능력보다는 혈통으로 평가가 갈리는 억울한 상황.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가 양반이냐 평민이냐는 회사의 규모나 업력에 따라 다르다. 스타트업의 경우 대부분 공채가 평민이 되고, 경력이 양반이 된다. 회사 초창기 어려울 때부터 젊음을 갈아 넣어서 회사를 키웠지만, 좋은 배경을 가진 경력사원이 들어와서 내 위로 올라가면, 난 무엇을 했는가, 내 젊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망할 놈의 회사..
그런데, 만약 그 회사의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기에는 경력직을 떠받들었지만 회사가 점점 커지고 신규로 뽑히는 공채 인력이 수백 명 수준이 된다. 늘어난 공채 인력은 동기라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자신들 만의 카르텔을 만들고, 공채 인력 홍은 공채를 배경 세력으로 하는 직원이 임원이 되면, 서로 올려주고 끌어주는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그럼 경력직 들은 마치 시대에 밀린 퇴물인양 점점 밀리게 된다. 그들은 뒤를 봐줄 동기도, 앞을 끌어줄 선배도 없기에 의도치 않게 적폐가 되어 중앙에서 밀려나 저기 먼 한지로 가게 된다.
지금 우리 회사는 후자에 가깝다. 공채는 스펙이 좋은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 뽑힌 것이고, 경력은 낮은 급의 회사에 있다가 운 좋게 여기로 옮겨 타기 한 사람. 그렇게 무시받게 되고 무능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아마 경철 과장도 그러했으리라.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들었다. 왜냐면 나도 양반, 순혈이 아니니까.
난 최대한 선입견 없이 대하려고 했다. 기존 업무에 맞춰서 업무도 할당해 줬다. 하지만 경철 과장은 이미 모든 의욕이 떨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경철 과장이 젊은 사람이었다면, 이대로면 얼마 후에 더는 못 있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겠지. 하지만 그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지 않은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가겠다는 얘기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멍하니 화면 속 업무 지침서만 보고 있길래 말을 걸었다.
"경철 과장님,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요?"
"네 팀장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커피 한잔을 뽑아서 흡연실로 갔다. 믹스 커피 한잔에 담배 한 모금을 빨면 하지 못할 말은 없다.
"경철 과장님, 구매팀에서 많이 힘드셨죠? 요즘은 좀 어떠세요?"
"여긴 다들 잘해줘서 감사하죠. 그런데 아직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는 감이 안 잡힙니다."
"네, 당연히 그렇죠. 오신 지 일주일 밖에 안 됐잖아요."
"그래도 뭔가 여기에서 도움이 돼야 제가 마음이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
"과장님, 그럼 일단 이렇게 해보시죠. 어깨부터 펴시고, 표정을 밝게 지어 보세요."
"네? 제가 그랬나요?"
"네, 그러셨어요. 그래서 다들 말 걸기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도 그만하세요."
"아, 미안합니다. 그게 습관이 돼서."
"또 미안하다, 굳이 저에게, 그리고 팀원들에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과장님의 역량을 보여주세요."
그랬다. 경철 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움추러들어 있었고, 그 덕분에 우울한 기분을 뿜뿜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잘 안 풀리면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일단 이것부터 고쳐야 할 것 같았다. 부모처럼 계속 잔소리를 할 수 없으니 대신 일주일에 한 번은 10분이라도 만나기로 했다. 물론 다른 팀원들에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봐주라는 말이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마더 테레사도 아니고, 사실 이 사람을 왜 끌어올리려고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장님께서 하셨던 말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못하는 사람도 끌어올려서 다 같이 잘되게 하려고 했지만, 경험상, 뛰어난 사람에게 100을 쓰면 그게 500이 될 수도 있고 1,000 혹은 그 이상의 수익이 날 수 있지만, 못하는 사람에게 100을 쓰면 110이 되거나 101, 혹은 100 미만이 되기도 하더라. 위로 올라갈수록 시간은 한정적이고 그 시간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 소중한 시간을 쓸 때 어쩔 수 없이 효율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난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한다."
그렇다. 나도 시간이 무한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잘하는 친구에게 시간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아직 경철 과장이라는 카드는 Hidden이다. '꽝'일 수도 있지만, 예상치 않게 '당첨'일 수도 있다. 사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모습이기에 측은지심이 생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매주 10분의 1:1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잘하는 게 뭔지 물어봤다. 그는 '장비를 잘 안다'라고 대답했다. 15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조사 별 장비의 특성과 장/단점을 잘 알고, 제조사 사람들과도 친해서 상세한 정보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순간 난 쾌재를 불렀다. 왜냐면 현재 우리 팀은 대부분 재무 출신이기 때문에 장비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철 과장님에게 특정 부서의 투자를 할당하지 않고, 투자 예정인 모든 장비에 대해서 모델 선정 적절성을 검토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부러 부서 주간회의에서 특정 장 비을 반려하거나 새로운 장비가 출시되었을 때 이를 경철 과장님에게 발표하도록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고, 경철 과장님의 어깨는 펴졌고, 목소리도 더 또렷해졌고, 이제는 여간하면 미안하단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임원 발표를 보며, 공채나 개국공신이 아닌 입장에서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윗사람들의 작은 표현 하나하나에 '내가 공채가 아니라서 그런가?'란 생각을 한 적도 많았다. 물론 실제로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이 날 그렇게 까지 신경 쓸 이유는 사실 없으니까.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평민도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양반이 될 수 있다. 성과로 보여줘야 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과를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임원이 되지 않는 길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어차피 노동법 상 내가 위법이나 회사에 중대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해고되진 않을 테니까.
적어도 내 무능을 내 출신 성분이 공채가 아니어서 그렇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
경철 과장님도 앞으로 생길 부침에 경력직임을 탓하기보다 노력이 부족했음을 탓하길 바라본다. (나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