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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줄 알아야 진짜 좋은 리더

혼자 할게 아니라면 기다려주자

by 구르미
ARL6DDUJBJHNZDPNEYPZFX7VJE.jpg 출처 :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economy/industry-company/2024/04/09/MTFP44YM65DLRHMTCWWLO4XFSM/)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매번 가던 회사 앞 저가 커피가게에 갔더니 커피 머신 앞에 로봇 바리스타가 있었다. 보기에 신기하긴 했는데, 문제는 뭔가가 사람처럼 빠릿빠릿하지가 않다. 숙련된 바리스타였다면 벌써 몇 잔을 뽑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옆에 가게로 가볼까도 싶었지만, 과연 로봇이 만드는 커피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 10여분을 기다리고 커피를 받아 들었다.


커피 맛은 사실 별다를 게 없었다. 기존과 동일한 수준의 원두, 동일한 기계로 그라인딩 하여 사람이 정한 레시피 대로 템핑을 하고 샷을 내렸을 것이다.


'저걸 왜 도입한 거지? 마케팅 용도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고정비라는 게 떠올랐다. 점심때 원래 알바는 2명이었다. 그러다가 저 로봇을 도입하고 한 명으로 줄인 것 같다.


바리스타의 시간당 임금을 2만 원으로 가정하고, 예상 수익을 가정해 보면,


기존) 2만 원 x 2인 x 8시간 = 32만 원

변경) 2만 원 x 1인 x 8시간 = 16만 원


그럼 루 16만 원이고 한 달 23일 평일 근무, 8일 휴일 근무(1.5배)로 치면 인건비로 560만 원 정도가 된다.


저 정도의 다관절 로봇이면 한대에 3~4천은 할 테니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런데 이게 10대, 100대, 1,000대가 된다면? 그럼 말이 달라진다. 그리고 여긴 체인점이다.


주인 입장에서는 조금 느리고 그래서 매출이 조금 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해볼 만한' 투자다. 그리고 저 로봇은 계약에 따라 리스일 수도 있으니 고정비 측면에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민주 님은 타 부서에서 전배 왔는데, 뭔가 일이 느리다. 내가 하면 5분이면 끝날 일인데, 그걸 5시간을 잡고 있는 경우도 봤다. 그렇다고 게으른 것도 아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방향을 잘 못 잡는다. 고구마 500개가 목에 막힌 기분이다. 그리고 그 정도를 기다렸는데도 결과가 내가 원하는 게 안 나온다.


그러면 난 이면지를 하나 꺼내서 어떻게 문서를 적어야 하는지, 어떻게 요청을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써주고 표를 그리고 이대로 하라고 한다. 그럼 민주 님은 그걸 문서화해서 보낸다. 처음에는 내가 해준 조언을 안 듣고 다르게 해보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지적을 했더니 이제는 거의 그대로 해서 보낸다. 표정이 좋지 않다. 당연히 그렇겠지. 나름 엘리트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통편집을 당한 기분일 테니.


사실 내 기분도 좋지 않다. 난 민주 님이 무언가 내가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으면 하는데, 과연 일을 한 게 맞나 싶은 어이없는 답만 들고 온다. 어쩌지..? 그냥 이렇게 신경을 끄고 적당한 일이나 시켜야 할까?


그러다가 어디선가 본 리더십 강의가 생각났다. 그때 강의를 생각나는 대로 재구성해봤다.




리더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밀착형 리더와 방임형 리더를 구분해 보겠습니다.


밀착형 리더는 직원을 마이크로 매니징 하는 리더로,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직원이 해야 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자 합니다. 물론 결과는 뒤에 말할 방임형 리더보다 좋게 나오고 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밑에 직원들의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불평이 제일 많아요.


또 다른 유형인 방임형 리더는 큰 그림은 같이 그리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나, 사소한 진행 방향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직원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위에서 보면 업무를 태만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대신 이 리더의 경우 직원들의 평가가 좋습니다. 자신이 방향을 잡고 일을 진행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리더의 초기에는 당연히 밀착형 리더가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고, 업무가 방대해진다면 밀착형 리더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모든 것을 다 신경 써줘야 조직이 운영되기 때문이죠. 또한 조직원들도 하나 둘 떠나서 계속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며 매번 새롭게 시작하게 되죠.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서 방임형 리더가 더 각광받고 있습니다.


업무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K-직장인, K-리더로서 기다린다는 것은 야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하 직원이 더 발전하기 원한다면, 내 부담이 줄어들길 원한다면, 명확히 가이드를 줬다면, 기다리세요. 그래야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어려운 말이다. 저 답답한 민주 님을 보면서, 어떻게 참고 기다릴 수 있냔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한가할 때야 사사건건 봐주지만, 바빠지면 불가능할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써봤다.


방향을 수정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다면, 메모장을 꺼내서 내 나름대로 내용을 작성한다. 예전 같으면 이대로 바로 보내고, 이 방향 참고해서 진행하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모장에 작성하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민주 님, 이거 이렇게 생각해서 저렇게 변경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혼자 정리해 보고 다 되면 같이 결과물 봅시다."


이렇게 시간을 주고, 애써 민주 님의 업무를 잊고 다른 일을 한다. 그리고 민주 님이 초안을 가져오면 같이 이야기를 하고, 함께 방향을 잡는다. 아까 메모장에 적었던 것은 굳이 전해주지 않는다. 메모장에 적은 건 내가 올바른 가이드를 주기 위한 생각 정리 수단이다.


과연 내가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 내가 얼마나 화를 내지 않을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 님이 커야, 나도 쉴 테고, 내 밑에 사람이 잘해야 나도 더 인정받을 것 아닌가.


난 이 일을 15년 넘게 했는데, 내가 원하는 수준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놀랄만한, 내가 재미있어할 만한 수준의 자료를 갖고 온다는 것은 초임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부디 민주 님이 색깔이 있는 자료를 갖고 오길 바라본다.


난 리더에 맞지 않나 봐. 하는 푸념과 함께, 태석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태석아, 오늘 저녁에 그때 갔던 홍어집 갈래? 나 속 좀 뻥 뚫고 싶다. 오늘은 내가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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