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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팀장이 되었을까?

by 구르미


팀 회식을 하러 갔는데 옆 테이블에 예전 팀 동료 주태가 있었다. 주태는 참 열심히 하던 친구였다. 그래서 나보다 진급도 더 빨랐고, 더 빨리 팀장이 되었다. 아마 주태가 팀장이 되던 즈음에 난 전략팀으로 옮겼고, 그 이후에는 지나가다 인사는 했지만 자주 보질 못했다.


반가운 마음에 주태를 불렀다.


"어이, 주태 팀장~ 오랜만이야! 회식 온 거야?"

"어,, 르미 팀장. 이렇게 다 보네, 아 근데 나 이제 팀장 아니야. 그리고 난 친구들이랑 왔어."

"어? 왜? 회사 그만둬?"

"아, 그건 아니고, 나중에 따로 얘기해 줄게."


사실 팀원들이랑 같이 온 회식이라 오래 자리를 비우기도 그랬고, 그때는 뭔가 찜찜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팀원들과 회식을 이어 갔다.


며칠 후 주태를 검색해 보니 다행히 검색은 됐는데, 문제는 이제 팀장이 아니었다. 주태의 후배였던 지영이가 팀장이 되어 있었다. 순간 궁금증이 발동하여, 그 팀에 있는 다른 지인들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예의상 주태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주태야, 너 잠깐 시간 돼? 어떻게 된 거야? 차라도 한잔 할래?"

"어, 그래. 지금 괜찮은데 넌 어때? 넌 바쁜 팀장이잖아~"

"에이, 그래도 차 한잔 마실 시간은 있어. 흡연장에서 보자!"


그렇게 흡연장에서 구름과자와 커피를 마시며 근황을 물어봤다.


"주태야, 무슨 일이야? 너 일도 잘했잖아."

"일을 잘한다고 팀장 하는 건 아니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팀에 대리 1년 차 인철이라고 있거든. 그 애가 인사팀에 말했다더라고. 내가 자기에게 업무를 제대로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뭐? 너 인철이하고 아예 말을 안 한 거야?"

"아, 그건 아니고. 작년에 평가가 좋지 않게 나왔는데, 나한테 말하더라고. 자기는 상위 고과 받을 사람인데 나한테 너무 소홀한 것 같다고."

"헐, 일은 자기가 찾아서 해야지. 여기가 학교야?"

"여하튼 그래서 이것저것 모아서 인사팀에 말했고, 또 주변에 친한 애들하고도 말 맞춰서 인사팀에 같이 말했나 봐."

"와, 요즘 애들 무섭다. 그나저나 넌 괜찮냐?"

"나야 괜찮지. 사실 나도 그만하고 싶었어. 어차피 돈도 크게 차이 없는데 고생과 책임은 엄청나잖아."

"맞아.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팀장이 되었을까?"

"전생이 니 팀장 등에 칼 꽂은 거 아냐?"

"ㅋㅋㅋㅋㅋ 그러게, 나 지금 회의 들어가 봐야 하는데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먼저 들어갈게 미안, "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요즘 젊은 사원들에게 파트장이나 팀장처럼 보직장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상당히 높은 비율로 "전 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마치 '팀장포비아' 같은 상황이다. 예전에는 다들 보직장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끝없는 야근과 회식을 했었는데..


요즘은 다르다. 다들 개인의 라이프밸런스가 중요하고, 회사 일은 최소한만 하고 싶어 한다. 혹시라도 퇴근에 임박해서 업무를 시키면 표정은 거의 생선 비린내를 맡은 표정처럼 썩어 있었고, 떽떽 거리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다 보면 그 떽떽 소리가 듣기 싫어 그런 친구들에게는 일을 안 주고, 그 친구는 그것이 전리품인 양 자랑스럽게 슬렁슬렁 회사를 다닌다. 상전이 따로 없다.


그러나 팀장은 어떤가,

팀장의 업무는 끝이 없다. 모든 일의 책임은 팀장에게 있고, 부서원들의 결과물을 하나하나 다 검토하고 수정해야 한다. 부서원들의 이름으로 나가는 게 결국 내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니.

또한 인력들도 관리해야 한다. 예전처럼 무관심하게 내 일만 했다간 주태 처럼 되기 십상이다. 친절하게 말해야 하고, 공감될 수 있게 업무 지시도 해야 한다.

거기에 위에 임원 눈치를 봐야 하니, 길게 휴가를 내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팀원들은 휴가를 가면 백업이 있지만, 팀장은 백업이 없다. 퇴근 시간도 똑같다. 애들은 다들 쿨하게 가지만, 난 임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팀장이란 감투 하나 달아주고 회사는 너무 팀장들을 괴롭힌다. 딱히 나도 바랬던 건 아닌데..


내가 원했던 팀장의 모습


한 때 나도 원했던 팀장의 모습이 있었다.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각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insight를 주고 연이은 성공을 이룩하는 모습. 지극히 실적만 바라보는 속물 팀장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크게 보고 싶었고, 크게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후배들 보고서 방향 잡아주고, 틀린 부분 찾아서 바꿔주고, 같이 보고 들어가고 같이 혼나고, 다시 또 방향 잡고.. 의미 없는 보고서 작성과 보고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무언가 창의적인 일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보고자료의 연속.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자영업을 하라고 했다. 이 일도 내가 필요하니 돈을 주고 시키는 것이구나 하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 낫긴 하지만, 재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지나간 세월이 벌써 15년이 넘었다. 내 젊음이 헛되이 지나간 것 같아 괜히 슬프다.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그럼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던 팀장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내려놓기였다. 난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 꼭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었다. 하나씩 놓아 보기로 했다.


1. 불필요한 회의는 당당히 no라고 하기

여기저기 팀장을 부르는 회의가 많다. 다들 편하겠지. 그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난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일과 후에나 가능하다. 과감하게 내가 할 말이 없는 회의는 안 간다고 했다.


2. 방향이 맞다면 굳이 보고서에 첨삭하지 않기

보고서도 결국 글이다. 내가 쓴 보고서여도 봐도 봐도 수정할게 생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쓴 글이면 오죽하리. 이것도 결국 욕심을 버려야 한다. 큰 그림이 맞다면 굳이 첨삭하지 않기로 했다. 메모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내가 아니니까, 애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3. 이슈가 없다면 팀원에게 맡겨보기

팀원들은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 같다. 일을 시키면 잘하고 있나 궁금하고, 과연 일정을 맞출 수 있나, 방향은 잘 잡고 있나 걱정이다. 그래서 툭하면 말을 걸어본다. "잘 되고 있어요? 같이 한번 볼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일을 시켰지만 팀원들이 아바타가 되어 내가 하란대로 하고 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생각을 잊게 된다. 팀장이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겠지. 그럼 결국 악순환이 되어 버린다. 내 머리에서 나오는 건 결국 오래 묵은 재미있지 않은 아이디어니까. 큰 문제가 없다면 팀원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일정 정도만 챙겨 보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다. 불안하다.


4. 프로젝트 스케쥴러 사용하기

납기를 잘 지키는 게 회사에서는 중요하다. 그래서 자주 팀원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물어보면 또 다른 질문이 생각나서 줄줄이 사탕으로 말이 길어진다. 그냥 대화를 차단하기로 했다. 비대면으로 스케쥴러에 접속해서 진행상황을 표시하고, 늦어지면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확실히 말을 안거니 잔소리도 줄었다. 내 시간도 늘었다.


5.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어려운 건 어렵다고 하기

팀원들 뿐 아니라 위에 임원들과도 관계 정리가 필요했다. 내 위 임원은 항상 나한테 뭘 시키고 이걸 왜 못하냐고 뭐라 한다. 그럼 난 굳이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알겠다고 한다. 그러곤 어떻게든 결과를 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애매한 결과를 들고 가서 또 혼난다. 시간은 시간대로 쓰는데 평가는 별로다. 그래서 모르는 건 모른다고, 어려운 건 어렵다고, 내가 못할 것 같은 건 다른 팀에게 시키라고 하기로 했다. 물론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건 힘들더라도 하겠지만, 나보다 다른 부서에서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회사로 보나 내 시간으로 보나 넘기는 게 맞다. 놓아주는 게 맞다.


항상 모든 것을 잘하려고만 했다. 그게 나 혼자 하는 것이었다면, 내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팀장이 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심이다. 왜냐면, 난 몸이 하나지, 팀원의 숫자만큼은 아니니까.


업무의 중요도를 생각해서, 내가 가능한 범주까지만 몰입해서 해보자. 이게 내가 시간 내에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냉정히 판단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윗사람에게 괜한 기대를 심게 해주는 것만큼 신뢰를 잃는 방법도 없다. 당당히 말하자. 그리고 당당히 업무를 나눠주자.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 그게 내 죄를 사하는 방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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