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리, 오늘 회식 어때?
요즘 팀장들에게 회식은 임원 보고만큼 어려운 자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회식하자고 하면 의례 전원 참석이었고, 팀장 혹은 가장 높은 분이 즐거울 수 있도록 사전에 콘텐츠를 준비하기도 했다.
**나도 신입 때 동기들과 '무조건' 노래를 개사해서 춤을 추며 불렀던 기억이 난다.**
술은 전투적으로 마셨고,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여러 자리를 돌아다니며 술을 권하고 어느 순간 내 잔이 어떤 잔인지 모르는 상황도 자주 벌어졌다.
1차가 끝나면 2차로 호프집을 갔고, 거기에서 또 신나게 마시고 3차로 노래방을 가서 또 술을 시켜서 마시고 4차로 24시 여는 해장국 집에 갔다가 또 술을 마시고 사우나를 가서 씻고 그대로 출근해서 오전 내내 팀원 모두 빌빌 거리다가 오후 휴가를 쓰고 퇴근하는 극도로 불필요한 비합리적인 회식이었다. 그때는 정말 하기 싫었던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기억은 추억 보정이 되기 마련이고 요즘은 좀 그립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은 회식이란 게 많이 달라졌다. 젊은 친구들은 업무 시간이 끝난 저녁 시간을 굳이 소모하기 싫어했고, "전 오늘 안 갈게요." ("못 갈게요."도 아니다.)도 서스름 없이 말한다. 그래서 회식을 해도 결국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나이 든 사람만 모이게 되고 매번 하던 얘기의 반복이라, 사실 재미가 없어 나도 회식을 꺼리게 된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기에 더 그럴 것이다.
그런데 부서를 옮기고, 내가 관리자가 된 후에는 왠지 회식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들었다. 회사에서는 회의를 해도 티타임을 해도 너무 호흡이 짧았었으니까.
그래서 담배타임 때 그나마 친한 태석 팀장에게 물어봤다.
"태석아, 요즘 너희 팀은 회식해?"
"회식? 회식은 가끔 하지, 저번주에도 했어. 점심때 쉑*버거에 갔었어."
"뭐? 햄버거? 점심에 회식을 한다고? 애들이랑 얘기는 좀 했고?"
"르미 팀장, 너 너무 꿈속에 사는 거 아니야? 요즘 애들이 노인네랑 술 마시겠냐? 그래도 이렇게 밖에 나가서 점심이라도 먹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주영이네 팀은 아예 점심 회식도 안 한데. 그냥 회의비로 가끔 알아서 배달음식 시켜 먹고 만다더라고. 그래서 그 녀석 매번 술이 고프다며 나한테 전화하잖아."
"그러게, 나도 아직 우리 팀이랑 회식을 안 했는데, 어떻게 하지.."
"너무 무리하지 마, 회식한다고 없었던 팀워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긴 해. 근데 또 술자리에서 나오는 말들이 있잖아."
"됐고, 오늘 저녁에 나랑 술이나 한잔 하자!"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팀원들과 친해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피하고 싶은 회식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술이 목적이 아닌 주제가 있는 회식은 이름으로는 참 그럴싸 하지만, 자칫하면 팀장만 좋은 등산 회식과 비슷하게 될 수 있다. 난 좋은 의도로 제안했지만 밑에 친구들은 다 속으로 불만을 갖고 블라인드에 신나게 내 욕을 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작은 아주 평범하게 시작해 보았다.
"민수님, 위스키 좋아하죠? 이번 주간 미팅 때 간단히 위스키 소개하는 걸 아이스브레이킹으로 회의 시작 때 해줄 수 있을까요?
"아, 네, 완전 전문적이진 않지만, 정리해 둔 게 있어서 5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보라고 하면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민수님이 위스키를 좋아하는 건 우연히 지나가다 친한 동료와 얘기하는 걸 들어서였다. 여행 가서 위스키 양조장 투어도 하고 좋은 위스키를 수집한다는 건 일부러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너무 잘 들렸다.
그렇게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위스키 소개를 했는데, 팀 내에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원래 5분을 예상했던 세션은 10분을 넘기고 다들 위스키 얘기에 즐거워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끝날 때 내가 제안을 했다.
"민수님이 너무 설명을 잘해줘서, 나도 갑자기 위스키가 당기네.. 그럼 이번 주에 위스키 먹으러 회식 한번 할까요? 회의비로 위스키를 먹기는 어려우니까 콜키지 프리인 곳에서 위스키를 마십시다. 저도 한병 찬조하겠습니다."
"와, 좋아요. 굴이랑 같이 먹으면 꿀맛인데, 굴찜 가게 어떨까요? 가격도 저렴합니다."
"네, 그럼 거기로 갑시다. 아예 바로 날짜를 정합시다. 이번 주 목요일 어때요?"
"네, 좋아요!!"
어느 정도 의도적이긴 했지만, 잘 풀렸다. 만약 내가 일방적으로 회식을 하자고 했다면, 장소를 알아서 정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주종을 정하고 페어링 할 수 있는 메뉴를 정한다면 기대감을 높일 수 있다. 회식에서 이야기할 위스키 이야기를 나도 준비해야겠다.
위스키 회식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음엔 막걸리 회식, 와인 회식, 수제 맥주 회식 등 술과 음식이 중심이 되는 회식 덕분에 우리 팀은 더 끈끈해졌다. 유튜브를 찍자는 제안도 나왔다. 다들 이렇게 먹는거에 진심인지는 몰랐다. 물론 회의비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간혹 내 지출이 커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행히 다들 센스가 있어서 알아서 다음 차수를 N빵 하거나 애장술을 들고 와서 다 같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회식 중에 절대 일 이야기를 안 하기로 하다 보니 회식은 점점 미식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들 숨겨둔 맛집을 공유하고, 어떻게 술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각자 노하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근데 맨날 술만 먹을 순 없는데,, 다른 건 뭐가 있을까?
겨울을 지나 날도 따뜻해지고, 기다려지는 회식을 만들기 위한 고민도 깊어져 갔다. 맨날 맛집만 가기엔 소재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생각난 게 캠핑 회식이었다.
6월 말은 해가 길어 거의 8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그래서 빠른 퇴근 후 회사 근처 캠핑장에 간다면 얼추 해가 지기 전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주간 회의 중 던져봤는데, 다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가 엠티를 가는 느낌이었다. 임원분의 출장 날짜에 맞춰 퇴근 시간 전에 선발대를 보내 예정된 마트와 식당에서 식재료와 음식을 픽업하여 캠핑장으로 갔다. 나머지도 퇴근 시간에 맞춰 재빨리 캠핑장으로 갔다. 탠트는 필요 없고 테이블과 의자만 깔면 충분했다. 서둘러 불을 피우고 소고기를 좀 구워 먹었더니 해가 지고 있었다. 강변에 있던 캠핑장에서 보는 일몰은 또 그렇게 멋있었다. 다 같이 일몰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고 삼겹살과 미나리를 같이 구워 2차로 먹고, 그리들에 국물 라면을 끓이고, 남은 국물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짜파게티를 먹고, 마지막으로 후식으로 고구마를 구웠다. 11시까지 알차게 먹고 대리를 불러 다들 집에 갔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나도 그렇고 팀원들도 그렇고 너무 즐거웠고, 언제 또 가냐며 자주 회자되고 있다. 사람들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회식도 결국 팀원이 소비자인 상품이다. 어떻게 기대감을 올리느냐가 그 성공을 좌우한다. 이번 작품은 성공적이었고, 우리는 더 끈끈해졌다.
물론 이렇게 친해진다고, 우리가 더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우리 사이가 좋다고 해도 성과가 안 나온다면 우리 팀의 평가는 낮아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내 평가도 낮아질 것이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팀장은 조직관리를 못하는 팀장 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조바심에 회식까지 일의 연장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젊은 친구들의 생각처럼, 회식을 하는 시간은 업무 외 시간이 아닌가. 그래서 난 회식은 서로가 더 친밀해지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식 때 잔소리를 늘어놔 봤자 잔소리 일 뿐이고 한쪽 귀로 들어가서 콧구멍으로 나올 뿐이다. 무언가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가까워지는 계기로 삼고 그렇게 유대관계를 쌓으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어려움을 버틸 수 있는 유대감이라는 끈이 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그 끈은 끈끈한 단결력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회식을 하면 팀원들이 즐거워할까. 마치 파티플래너가 된 느낌이긴 한데, 왠지 즐겁다. 왜냐면, 나도 그 시간이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