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백작은 최고의 팀장인가?
이거 아직 안 됐어?
내가 이거 2주 전에 시킨 일이잖아?
담당자가 누구야? 민수?
걔 어딨 는데? 휴가라고?
야, 김팀장, 너 애들 관리 어떻게 하는 거야?
겉으로는 부여된 휴가를 가급적 다 쓰라고 하지만, 이번 건은 연휴 때도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리고 일이 있는데 휴가를 썼다는 게 긁혔나 보다. 언제까지 해야 할지 미리 날짜를 질의했어야 했는데 온도를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일 수도 있지만, 난 또 무능한 팀장이 되었다.
우리 팀원들은 불만이 많다. 잘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평가가 잘 나오지 않은 영민님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평가를 잘 받을 수 있냐며 대뜸 나에게 물어본다. 답은 없다. 나라면 이런 이런 걸 해야 한다.라고 말해줬지만, 예전엔 이런 질문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어디 감히..
휴가를 쓴다고 할 때도 항상 웃으며, '본인 휴가인데요 뭐, 편하게 쓰세요'라고 말하지만 난 작년 휴가의 절반도 못 썼다. 올해는 얼마나 쓰려나.
윗사람들은 팀장이란 자고로 팀원들을 짜고 짜고 또 짜내서 그 팀이 효율이 좋은 팀이길 원하는 것 같다. 힘들다는 소리가 많이 나올수록 왠지 알차게 활용했다는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팀장 입장에선 팀원들도 고객이다. 고객이 떠나면 식당은 문을 닫는다. 고객의 수요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고객이 좋아할지를 찾아야 업무 결과라는 비용을 지불한다. 어차피 나 혼자서 일을 다 할 순 없으니 별 수 없이 팀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예전처럼 강압적인 지시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렇게 하다간 직장 내 괴롭힘으로 블라인드에 뜨고 인기인이 되어 집에 가기 십상이다.
아수라 백작이 되어야 하나? (찾아보니 아수라 남작이 맞음)
큰 소리가 났지만 다들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뻔한 오후였다.
오늘은 명절 연휴+회사 권고 휴무일 다음날이었고, 임원이 시킨 일은 연휴 바로 전 시킨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2주 전에 시킨 일은 맞네.
그리고 마침 민수님은 오늘까지 휴가다. 반년 전에 잡은 휴가라 이 일을 시키기 전에 이미 예약은 끝났다. 큰 그림은 휴가 전에 같이 잡고, 다녀와서 일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아무도 Due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 임원도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설마 연휴 다음날에 가져오라고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연휴 끝나고 진행 중인 것 정리해서 현황 보고 했더니 왜 오늘까지 완료하지 않았냐며 난리다.
연휴 중에 일을 했어야 했던 건지, 모든 걸 예상하고 민수님에게 비행기 일정을 바꾸라고 했어야 했던 건지. 오만 생각이 머리를 짓누른다.
'못 해 먹겠네.'
새로운 임원은 매번 나쁜 팀장이 되라고 한다. 쉼 없이 쪼고 감시하고 질문해야 성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밑에 사람들은 다 하찮은 존재다. 하찮은 존재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매번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게 아니라고, 내 말을 이해 못 하겠어?"
그는 나도 그런 나쁜 사람이 되길 원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과가 안 나온다고 믿으니까.
급 스트레스가 밀려와서 금연껌은 던져두고 흡연장으로 갔다. 예전에만 해도 구름 친구들이 많았다. 흡연장에 가면 믹스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서 달달한 커피 한잔 하며 동료들과 수다 떨며 한대 피는 담배가 그렇게 맛있었다. 그런데 동기들은 다들 이 회사 저회사로 떠나고 신입사원들은 흡연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건강증진이니 뭐니 해서 흡연장은 10분은 걸어가야 하는 먼 곳으로 옮겨졌고, 기존에 있던 자판기도 사라지고 휑한 곳에 쓰레기통만 달랑 있다. 마치 지금 내 신세 같아서 서글프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블라인드'를 켰다.
'블라인드'의 9할은 다른 사람 험담인 것 같다. 그리고 그 9할의 9할은 윗사람 욕이다. 자기 사람들만 챙긴다느니, 팀원들에게 관심이 없다느니, 쓸데없는 일을 시켜서 힘들다느니, 아니면 정체 모를 험담들이다. 이 정도면 최강 빌런이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무례한 관리자가 줄긴 했다. 예전엔 폭언은 일상이었고, 폭력도 있었다고 한다. 나도 폭언은 많이 경험했는데, 요즘은 법이 강화되어 자칫 험한 말 했다가 신고당하면 그대로 집에 가야 한다. 물론 팀장은 예외다. 왜냐면 팀장한테 막대하는 임원이 그 팀장이 가야 할 곳이니까. 그가 내가 다음에 열어야 할 문의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에 그도 나에게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도 그렇게 당했을 테고.
어쨌든 난, 나쁜 팀장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십계명? 스럽게 철칙을 세웠다.
모호하게 업무 지시할 때 진짜 짜증 났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강압적인 태도로 있으니 다시 물어보기도 어렵다. 물어보면 "왜 그것도 이해 못 해?!"라는 짜증스러운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리고 다시 물어도 명확하게 지시를 주지도 않는다. 아주 두리뭉실하고, 결국 내가 알아서 답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이럴 경우 결과를 보고해도 말이 바뀌고 새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면 시키는 사람도 머릿속에서 잘 정리가 안 됐으니까. 알잘딱깔센도 뭐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난 최대한 지시를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잘 이해하는지 묻고, 대화하며 결과물의 방향도 수정했다. 어쩔 땐 아예 결과물을 대략적으로 만들어 여기에 내용 채워오라고 했다.
내가 업무를 시켰지만, 내가 업무를 잘 못 시켜 다시 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내 팀장은 그럴 경우 바로 말을 바꿨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 그러면 순간 멍하니 있다가, 아 네, 그렇게 바꾸겠습니다. 하고 자리에 온 후 짜증이나 애꿎은 담배만 늘었다. 틀렸으면 틀렸다. 괜한 수고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 대신 이걸 활용해서 이렇게 해보자.라고 내 실책은 잘 못했다고 해야 내가 잘한 것도 더 티가 난다.
예전에 모신 팀장님 중에 화가 많고 급한 성격의 팀장님이 있었다. 그분께 보고를 하러 가면 5분도 되기 전에 '그게 아니지!'라며 말을 끊었다. 근데 끊고 말하다 보면 내가 다시 말한다. '아, 그건 여기 바로 밑에 있습니다.' 천천히 들으면 될 걸 왜 그리 급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최대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라고 한다. 대신 시작하기 전에 말한다. 끊진 않을 테니 요점만 말하라고. 수정할 게 있더라도 메모해 두고 보고가 끝나고 말한다. 그래야 그 사람도 보고가 늘지, 자꾸 끊어대면 자주 뚜껑을 열어본 밥처럼 설익을 수밖에 없다.
당일 내에 끝내야 하는 일도 있지만, 가끔 호흡이 길게 가는 일들도 있다. 실무자가 중간중간에 진행 상황을 말해주면 좋겠지만, 그냥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결과가 잘 나오면 상관없지만, 결과가 영 이상하게 나오면 시간은 시간대로 지나고 결과는 안 나오고.. 한마디로 대 폭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시할 때도 명확한 지시를 하지만 중간중간 진행상황을 물어봐줘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강조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보완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쓰이긴 하는데, 아주 짧게라도 "OO님, 그거 잘 돼 가요?"라고만 물어봐도 팀원 입장에선 '아, 팀장님이 이거에 관심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무실은 여러 팀이 함께 쓴다. '미생'에 나오는 사무실처럼 칸막이는 있지만 다 뚫려있다. 그래서 어느 팀장이 누구에게 화를 내면 다 들린다. 화를 작게 내진 않으니까. 뭔가 측은지심이 들면서도, 팀장이 되니까 이게 선입견이 돼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주 혼나는 사람이면 왠지 그 사람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프레임이 씌워진다. 실제 그 사람과 일해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 사람은 나에게 무능한 사람이 돼버린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런데 또 칭찬하는 소리는 듣기 힘들다. 칭찬을 하면 뭔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난 가급적이면 혼내야 할 때 참을 인을 새기며 바로 말을 안 한다. 그리고 한 번씩 있는 1:1에서 말한다. 이런 건 고칩시다. 업무적으로도 틀린 게 있으면 개별로 말해준다. 간혹 예시 삼아 틀린 걸 공개해야 할 때도 팀원 이름은 가급적 노출 안되게 한다. 물론 당사자는 알겠지만.
대신 칭찬은 공개적으로 한다. 가장 좋은 기회가 부서 회의이다. 업무 현황을 공유하다가 잘한 게 있으면 그때 OO님이 이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라고 이름을 꼭 말한다. 어차피 내가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나도 내 팀원들에게 나쁜 팀장일 수도 있다. 너무 마이크로 매니징 하려고 하고, 귀찮게 한다고.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다는 걸 조금이라도 느끼면 좋겠다. 그리고 꼭 좋은 팀장이 착한 팀장은 아니니 나쁘게 말해야 할 때는 강하게 말해야겠지. 그 중도를 지키다 보면 적당히 믹스업 된 무언가가 되겠지.
고민하다 보니 또 담배가 당기네..
좋든 나쁘든, 퇴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