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기만 한 자막 없이 영화 보기의 꿈
학창 시절에도, 사회에 나와서도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왔다. 이메일을 쓰고, 회의에서 말하고, 여행에서도 틈틈이 영어를 사용하며 연습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영어로 말하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그런데 듣기는 여전히 어렵다. 왜일까?
요즘 F1 레이스에 푹 빠져 있다. 포디엄에 오른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하는 장면은 팬들에게 꽤 중요한 순간이다. 얼마 전, 2025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맥라렌의 오스카 피아스트리(호주 출신)가 1위를 차지했고, 영국 출신 드라이버 조지 러셀과 루이스 해밀턴이 각각 2위와 3위로 올라섰다. 내가 응원하는 맥라렌의 선수가 우승하여 기분이 더 좋았다. 부푼 마음에 인터뷰를 들어봤다.
Oscar Piastri (우승자):
"It wasn’t an easy race, especially towards the end. The tires were going off pretty quickly, but I managed the gap and kept it clean."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와 억양에는 익숙했지만, 인터뷰를 들으며 좌절감을 느꼈다. 실제로 피아스트리가 말을 할 때에는 "Th'tires were goin' off pretty quick’ly"처럼 말을 이상하게 붙여서 말해서 속도감 있는 말투와 억양 때문에 단어 경계가 사라지며, 처음 듣는 난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기도 했고, 나중에 스크립트에서 본 "tires were going off pretty quickly"라는 문구 자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타이어 성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라 F1 팬으로서 추측해 볼 뿐이다. 결국 해설자의 번역을 듣고서야 '아, 그런 말을 했구나' 하며 이해하게 됐다.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 영어는 반쪽짜리인가? 왜 말은 되는데 듣기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
듣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영어를 '글'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글을 배우기 전에 소리를 듣고, 그것을 흉내 내며 언어를 익힌다. 듣기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면, 우리는 글로 영어를 배우고, 시청각 자료로 공부한다고 해도 여전히 단어 중심, 문장 중심으로 접근한다. 실제 상황에서의 맥락 있는 대화 경험은 현저히 부족하다.
혼자 중얼거리며 발음을 익히는 방식은 마치 가수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음치 클리닉에서 양철통을 뒤집어쓰고 노래를 부르게 하는 이유는,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듣는 훈련 없이 말하기만 늘어놓는 것은 절반만 익힌 언어 능력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너무 '정형화된' 영어만 배워왔다는 점이다.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라는 식의 교과서 영어는 실제 현장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네이티브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표현, 축약, 속어, 억양, 감정을 섞어 말한다. 우리가 배운 문장에는 존재하지 않는 리듬과 변형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살아있는 영어'는 배우지 못한 셈이다.
더욱 어려운 점은, 영어는 한국어처럼 단어와 단어 사이를 또렷하게 끊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뷰나 일상 대화에서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발음이 약화되거나 탈락하는 현상이 빈번하다. 예를 들어, **"Did you eat?"**은 "Didya eat?", **"What are you going to do?"**는 **"Whatcha gonna do?"**처럼 들릴 수 있다. 학교에서는 이런 형태를 거의 배우지 않는다. 이로 인해, 문장 전체는 들리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생긴다.
참고를 위해 몇 가지 검색해서 찾아본 축약 표현을 나열하였으니 외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
What are you doing? → Whatcha doin’?
Did you see it? → Didja see it?
Going to → Gonna
Want to → Wanna
Let me → Lemme
가장 기본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은, 귀에 익을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것이다. F1 인터뷰를 예로 들자면, 처음에는 단어 하나, 둘밖에 들리지 않지만, 반복해서 들으면 문장 구조와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분명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 또 들어야 하니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는 결국 '노출 빈도'의 싸움이다. 어릴 때처럼,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듣고, 들리는 구간을 점점 넓혀 나가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듣기가 어려운 이유는 상대가 나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속도'로 말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원어민 수준의 인터뷰나 영화를 듣기보다는, 유아용 영어, 쉬운 뉴스, 짧은 스토리부터 시작하자. 최근에는 유튜브, 팟캐스트, AI 챗봇(GPT 포함) 등 다양한 도구로 쉬운 대화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전화 영어, 화상 영어도 유용하다.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감을 쌓아야, 점점 어려운 콘텐츠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다.
추가로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자막을 보며 들은 뒤, 자막 없이 다시 듣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바꿔주는 훈련이 된다. 즉, 시각적 이해와 청각적 인식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연습이다. 이 과정이 쌓이면, 더 이상 글로 익힌 영어와 들리는 영어 사이의 괴리를 줄일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를 다시 시작할 때,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자막 없이 영어 영화를 보는 것. 수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처음 보는 영화는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엔 의욕적으로 도전했지만 금세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건 단기간 공부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많이 듣고, 많이 접하고, 많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한국에 살면서 영어 콘텐츠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면, 그만큼 많이 들어야 한다. F1 인터뷰 하나를 제대로 듣기 위해, 수십 개의 클립을 들어야 할 수도 있다. 쉽진 않지만, 누구나 할 수는 있다.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들을 수 있어야,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