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사람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수현 님은 일 센스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일을 시키면 늘 두세 걸음 먼저 생각하고, 필요한 걸 빠짐없이 챙겨서 결과로 보여줬다. 덕분에 함께 일할 때는 늘 든든했고, 말 그대로 큰 도움이 됐었다.
얼마 전, 신사업팀에서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잠시 고민은 했지만 결국 수현 님의 이름을 적었다. 팀에서 보내는 게 아쉽긴 했지만, 나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그런 기회를 열어주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신사업팀도 같은 층에 있어서,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도 하고 여유가 있으면 짧게 안부도 나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수현 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웃어도 눈에 기운이 없었고, 뭔가에 닳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꼭 멘털이 털린 사람 같았달까.
그러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일부러 웃으며 말을 걸었다.
“수현 님, 요즘 얼굴이 소멸 직전이에요. 운동 너무 열심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수현 님은 잠시 멈칫하더니 힘없이 웃었다.
“팀장님, 저 요즘 운동은커녕 걷는 것도 기계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보다… 저,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왜요? 다들 거기 가고 싶어 했던 팀이잖아요. 혹시 누가 괴롭혀요?”
“여기서 말씀드리긴 좀 그런데…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차 한 잔 하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변을 힐끗 둘러봤다. 복도에는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금세 소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오케이, 회의 가는 척 수첩 들고 갑시다. 누가 보면 작당모의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회사가 커지면서 참 복잡해졌다. 함께 차를 마시는 것조차도 구설에 오를 수 있는 공간. 퇴사설부터 인사이동설까지, 침묵을 타고 퍼지는 소문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엔 조심스레 일하는 척이라는 포장이 필요했다.
회의실에 앉아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숨을 고르고 나서야 수현 님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이 많아서 힘든 건 아니에요. 원래 바빴던 건 익숙하니까 괜찮은데… 지금 팀장님은, 그러니까 최팀장님은… 제 이름이 어디 적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일은 수현 님이 하는 거잖아요.”
“네. 기획서도 제가 만들고, 제안서도 제가 다듬어요. 근데 결과물은 항상 최팀장님 이름으로 나가요. 상무님께 보고할 때도 저 없이 혼자 가시고요. 제가 쓴 문서도 문체를 전부 고쳐서 올리시는데, 그러다 가끔 내용이 틀어지기도 해요. 그러면 상무님한테 혼나시고… 그럼 또 저한테 화풀이하시죠.”
수현 님은 말을 이어가다 말고, 시선을 테이블로 떨궜다.
“잘하려고 해도 보이지 않아요. 내가 한 일이 나를 증명하지 못하는 느낌이에요. 그냥… 이름 없는 행인1 처럼 일하다가 사라질 것 같아요.”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 감정이 어떤 건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회의 때는 빠지고, 결과는 빼앗기고, 공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상황들. 마음 한구석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기분.
그래서 그 말을 꺼냈다.
“다시 팀을 옮기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최팀장님과 딱히 친한 것도 아니라 뭐라 말하기도 애매해요. 하지만… 수현 님이 했던 일들, 꼭 잘 정리해 두세요. 결과물이 아니라 증거로 남기세요. 그건 나중에 분명히 자산이 돼요. 지금은 아무도 몰라도, 결국 자신이 증명할 수 있는 건 자기밖에 없거든요.”
수현 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씁쓸한 표정이었다.
“기운이 좀 빠지네요. 진짜, 그냥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날 이후, 나는 내 방식이 맞았는지 다시 되짚어보게 됐다. 그래서 내 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 나는 이렇게 해왔다.
보고서가 필요할 때는 말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최종 결과물의 형태로 전체 틀을 만들어 주고, 필요한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질문만 잔뜩 던지는 건 스무고개에 불과하다. 지시는 정확해야 하고, 목적지가 뚜렷해야 한다.
내가 방향을 잡고 컨셉을 제시했더라도, 보고서는 작성자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말한다. “이건 제 생각일 뿐이고, OO님의 의견이 담긴 보고서를 보고 싶어요. 마음껏 바꾸셔도 됩니다.” 그 말 한마디가 책임감이 되고, 자율성이 된다.
결과물은 만든 사람이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상급자에게 보고할 땐 작성자가 직접 나서게 한다. 나는 배석해 옆에서 보완만 해준다. 보고 전에는 시뮬레이션을 함께 한다.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한번 해보세요.” 이런 과정을 함께하면 자신감도 생기고, 나 역시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수현 님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어쩌면 이건 수현 님의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다짐했다.
내 팀원들만큼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하자.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보호막이니까.
이제 막 이름을 얻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지켜갈 수 있도록.
조직 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예전에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니 밑에 애들이 잘해야 니가 잘하는거야.
니가 잘하면 넌 좋은 직원이지만, 니 밑에 애들이 잘 못하면 넌 좋은 팀장은 될 수 없어."
역시나 어렵다. 오랜만에 수현님 포함 우리팀 예전 OB 멤버들 모아서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물론 그 친구들이 받아준다는 가정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