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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사람을 보내는 방법

또 한 명이 회사에서 유령이 되었다

by 구르미

유령이 된 중간관리자


지금은 다른 층에서 일하지만, 예전에 개발팀에서 같이 일하던 수영님을 오랜만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손에는 작은 박스를 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수영 파트장님, 부서 옮기시는 거예요?”


“아, 저 육아휴직 들어가요. 다른 분이 제 자리에 오신다고 해서 짐을 좀 챙기고 있는 중이에요.”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그의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통상적으로 육아휴직을 쓰는 시기는 아닌데,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개발팀 동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민수야, 박 파트장님 갑자기 육아휴직 간다는데,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르미야, 박 파트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 새로 온 임원이랑 맞지 않았나 봐. 처음엔 일 시키더니 자기 기준에 안 맞는다고 일을 안 줬다더라.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대.”


“개발팀 바쁜 거 아냐? 그럼 박 파트장님 팀은?”


“밑에 사원들은 그냥 일하는데, 박 파트장님은 관리 자니까 직접 손을 댈 수도 없고, 위에서는 일 안 주고... 엄청 괴로우셨을 거야.”


직장인에게, 특히 중간관리자에게 ‘일을 준다’는 건 곧 인정의 표시다. 부서원에게 일이 없는 것도 버겁지만, 관리자는 더하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주지 않는다는 건...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무언의 선언과 같다.


그렇게 관심에서 멀어진 관리자에게 하루는 정말 길다.


아침에 출근해 온갖 메일을 꼼꼼히 읽는다. 혹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굳이 담당이 아닌 메일에도 의견을 담아 답장한다. 괜히 다른 사람 업무에도 슬쩍 관여해 본다. 관련 뉴스, 산업 동향, 논문까지 읽는다. 평소엔 보지도 않던 분야다.


작업 중인 문서를 또 검토한다. 글자 하나, 서식 하나까지. 업무현황 정리 엑셀도 새로 만들어 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아직 하루의 반이 남았다.


괜히 부서원과 1:1 면담도 하고, 회의도 열어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본다. 팀장은 다른 부서와 바쁘게 회의 중이다. 우리 부서에 줄 일도 많을 텐데. 눈치가 보인다. 먼저 퇴근하면 진짜 ‘쓸모없는 관리자’처럼 보일까 봐. 괜히 또 일거리를 찾아본다.


팀장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뭐가 그리 바빠서 아직 안 갔어요?”라고 물을까 봐 겁난다. 그 한마디가 나를 더 무너뜨릴지도 모르니까.


한때 자신감 넘치던 그는 어디 갔을까. 무언가를 다시 도전할 의지도 이제는 흐릿해졌다. 그렇게 그는, 조용히 사라지는 사무실의 유령이 된다.


대기업에서 사람을 줄이는 법


한국 대기업에서 중간관리자를 정리하는 방식은 대개 직접적이지 않다. 특별한 사유 없이 해고가 어렵고, 경영 상황이 나쁘지 않은 한 조직적으로 인력을 조정하는 것도 부담이다. 특히 관리자급은 그 대상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꼭 경영 상황 때문에만 사람을 줄이는 건 아니다. 부하 직원들을 협력자가 아닌 ‘부품’으로 여기는 이들에겐..


단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는 사람을 내보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라는 수단이 선택된다.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요즘은 괴롭히다 걸리면 자기 목이 날아가니까.


그 대신 말을 걸지 않고, 일을 주지 않고, 시선조차 피한다. 그 무심한 방식이 더 잔인하다. 마치 성과주의라는 명분 뒤에 숨은 ‘능력주의자의 무책임’이다.

"나는 성과만 따르지, 모두를 끌고 갈 시간은 없어."

그 말에선 차가운 자기 확신과 이기심이 묻어난다.


오늘도 한 명의, 한때 잘 나가던 능력자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유는 단 하나, 임원 취향에 맞지 않았다는 것. 괜한 허무함에, 오늘은 집에서 위스키 한 잔 하고 잠들어야겠다. 내가 그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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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으로 조회수를 보다가 하루 조회수가 7천이 넘었다길래 무슨일인가 했더니 다음 '직장in' 메인에 글이 올라갔네요.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나 봅니다.

힐링을 위해 요즘 텃밭을 하고 있습니다.

간간히 올릴 연재도 한번 봐주세요!


https://m.blog.naver.com/haffywind/22389151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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